후성유전학(epigenetic)을 통해 한 단계 진화한 항암제를 개발하려는 국내외 바이오제약회사의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유전자 제어시스템을 조절해 암을 일으키는 비정상적인 세포증식(과발현)을 억제해 질환을 치료하는 것이다. 머크·로슈 등 글로벌제약사뿐 아니라 카이노스메드와 같은 국내기업들이 후성유전학에 기초한 신약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후성유전학, 유전자 제어시스템을 콘트롤
인간의 세포는 2만 2000개의 유전자가 있는데 그 유전자는 필요한 시간에 적절한 세포내에서만 활성화된다. 인간의 게놈(genome)안에는 정밀한 유전자 제어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후생유전학은 유전자의 변화보다는 제어시스템, 즉 유전자의 발현 조절 기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쉽게 말해서 유전자의 발현과 조절을 담당하는 온(on) 오프(off) 스위치를 찾는 것이다.
후성유전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유전자의 발현과 억제를 담당하는 후성유전물질을 찾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물질은 히스톤(histone)이라는 단백질과 메틸기(methyl group), 아세틸기(acetyl group)라는 화학물질 등이다.
◇유전자 발현 억제해 암 치료 가능성 제시
현재까지 상용화된 항암제 중 가장 진화한 것은 표적항암제다. 암세포와 정상세포를 가리지 않고 공격해 부작용이 심했던 과거 세포독성 항암제를 대체한 것이다. 표적항암제는 암 세포를 발현하는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겨냥한 것으로 특정 단백질이나 항원을 인식해 암 세포를 선택적으로 제거한다.
후성유전학은 유전자 이상을 직접 겨냥하기보다는 유전자의 발현과 억제 기전을 활용해 암을 치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전자의 발현과 억제를 담당하는 기전에 문제가 생기면 발암유전자를 활성화시키거나 종양억제유전자를 침묵시켜 암을 초래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후성 유전학에 근거한 후보 물질을 찾아 유전적으로 예측가능한 발암 유전자의 발현을 차단할 수 있도록 하는 표적항암치료제 연구가 활발해졌다.
아자시티딘(Azacitidine, Celgene)은 2004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 받아 골수이형성증치료에 이용하는 대표적인 후성유전 표적항암치료제(DNMT 저해제)다. 이 항암제는 암 억제 유전자의 활성을 방해하는 과메틸화를 저해해 암 억제유전자가 정상적으로 발현하게 만든다. 같은 타깃의 약물로는 2006년 승인 받은 데시타빈(Decitabine, Eisai)이 있다.
히스톤 디아세틸라제(HDAC: histone deacetylase)라는 효소에 작용하는 HDAC 저해제는 각각 2006년 2009년 승인된 보리노스타트(Vorinostat, Merck)와 로미뎁신(Romidespin, Celgene)으로 상품명으로 출시됐다.
HDAC는 히스톤 단백질의 변형을 통해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거나 끔으로써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T세포림프종에 적용되는 HDAC 저해제는 암세포 생존 관련 인자의 활성을 저하시키고 암세포 사멸을 유도한다.
◇BRD4· EZH2 저해제 새로운 후보군
하지만 초기 약물들은 치료 반응률이 낮고 치료 재발률이 높다는 단점이 두드러졌다.
최근에는 염색질의 구조변화 효소와 유전자 전사 조절에 관여하는 브로모도메인(Bromodomain, BRD)을 새로운 타깃으로 삼고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종양의 생존, 변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중요한 전사인자인 'C-myc'의 과다발현을 효소를 통해 저해해 암을 억제하는 원리다.
머크사는 BRD4 저해제(OTX-015)를 개발해 급성 골수성 백혈병에 적용한 임상1상을 진행하고 있으며 국내 기업인 카이노스메드도 2015년 12월 중국 양저우 애이디어 바이오텍에 관련 기술을 이전하며 공동 임상을 준비 중이다.
발암유전자로 알려진 EZH2(enhancer of zeste homolog 2)를 억제해 전립선암 림프종 등을 치료하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 임상 초기단계여서 신약 출시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카이노스메드 관계자는 “낮은 독성의 후성유전학 기반의 항암제를 기존 항암제와 병행하게 될 경우 지속적인 항암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