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선 영친왕을 망명시키기 위해 덕혜옹주까지 나서 구출 작전을 돕는다. 덕혜옹주는 재일 조선인 노동자 앞에서 선동도 한다. 영화는 조선 왕족을 미화한다. 무력하게 나라를 빼앗겼고 그 후 단말마적인 반항 한 번 해 보지 못한 못난 왕족을 영화는 눈감아 버린다. 감독은 그리 믿고 싶었던 게 아닐까?
‘덕혜옹주’는 벌써 관객 수 500만 흥행 기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렇게 선전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원작인 소설 ‘덕혜옹주’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라는 흥미로운 타이틀을 제외하곤 드라마틱과 감동을 주기에는 10% 부족했다. 나라 잃은 처연한 옹주의 슬픈 왕족사인 소설 ‘덕혜옹주’를 어떻게 장편 상업영화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것도 섬세한 멜로 영화의 대가인 허진호 감독이었기에 더욱 궁금했다. 방법은 하나, 조선 왕가를 독립운동의 왕조로 바꾸는 것이었다.
덕혜옹주는 이미 여러 대중매체에 선보였던 소재다. 윤석화가 주연한 연극도 있고 광복절 특집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다시 덕혜옹주를 역사의 무덤에서 끄집어 낸 건 소설가 권비영 씨의 작품 ‘덕혜옹주’였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고종황제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황녀로서의 고귀한 삶을 살지 못했던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흔적도 없이 잊힌 그 삶이 너무 아파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권 씨의 소감이다.
사실 소설이 나오기 전에 덕혜옹주의 생애를 다룬 책이 있었다. 부끄럽지만 일본 작가에 의해서다. 혼마 야스코(本馬恭子)에 의해 씌어진 책 이름은 ‘덕혜희’(德惠姬)였다. 그녀는 일본 문학을 공부하는 학자였다. 일본 여성사를 공부하다가 우연히 조선의 덕혜옹주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두 가지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덕혜옹주의 삶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문학도답게 덕혜옹주와 정략적으로 결혼한 소 다케유키(宗武志)가 쓴 시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저자는 덕혜옹주를 정신병으로 몰아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새 장가를 간 악덕 남편으로 알려진 소 다케유키에 대해 시종 변호한다. 대마도 번주의 후손인 소 다케유키는 실제로는 다정다감한 성격에 덕혜옹주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시를 여러 편 짓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소 다케유키를 선악의 구별이 힘든 무색무취의 캐릭터로 표현했다.
혼마 야스코의 책이 먼저 번역 출판되다 보니 권비영의 ‘덕혜옹주’는 표절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혼마 야스코는 자신의 평생 노작을 양해 한 마디 없이 그대로 소설에 인용한 것에 분개한다. 권 씨는 ‘역사적 사실’이 저작권 보호의 대상인가라며 단지 사소한 오해에 의한 것이라 해명하였다.
옹주란 왕의 후궁이 낳은 여식을 말한다.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은 명성황후에게서 순종을 낳는다. 이후 장 씨와 엄비에게서 이강(의친왕)과 이은(영친왕)을, 복녕당 양 귀인에게서는 덕혜옹주를 얻는다. 고종이 환갑에 얻은 딸이니 얼마나 이뻐했겠는가? 생후 50일도 안 된 갓난아이를 왕의 침전으로 데려오는 것은 왕실 법도를 무시한 행동이지만 고종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덕혜는 조선이 외세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가 되어가는 모습을 온몸으로 겪고 보아야 했다. 제정신으로 버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 속에선 해방 후 귀국이 좌절되자 정신병을 앓은 것으로 나오나 실제로는 결혼 전부터 조현병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덕혜의 정신병에 대해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유전적인 문제가 있어 덕혜의 딸 역시 비슷한 병을 앓다가 자살하였다고도 하고 극도의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병을 얻게 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덕혜옹주는 일본에 합방된 지 2년쯤 되던 해, 1912년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일제는 조선황실의 자취를 완전히 지워 버리고자 그녀의 오빠인 영친왕에 이어 13세의 어린 나이인 덕혜마저 일본으로 유학을 보낸다. 일본은 강점 초기에는 조선의 왕실을 우대해 준다.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일본 왕세자가 직접 마중을 나오기도 했고 재정적으로 상당한 지원을 해 주기도 한다. 일본에서 영친왕은 골프나 여행으로 소일했다. 물론 빼앗긴 조국에 대한 아픔이야 왜 없었겠는가? 왕조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의 나라일진대. 그러나 그것뿐 어떠한 구체적 행동도 하지 않는다.
혹여 어린 청소년들이 영화 ‘덕혜옹주’를 보고 조선 왕실 후손들이 목숨을 건 독립운동을 한 걸로 잘못 이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부끄러운 것도 역사다. 의친왕만이 상하이에서 망명을 위해 임시정부와 접촉을 시도했던 게 전부다. 해방 후에도 조선 왕실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했다. 백성들이 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500년 역사의 왕조를 갖고 있지만 영국이나 일본처럼 존경받는 왕실은 갖지 못했다.
이승만은 해방 후 영친왕과 덕혜옹주를 한국으로 부르지 않았다. 혹여라도 옛 왕실을 중심으로 뭉쳐 통치를 방해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 내내 덕혜는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고국 땅을 밟지 못한다.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 영화에선 평생 덕혜옹주를 지켜주는 독립운동가 김장한이 한국의 신문기자가 되어 등장한다. 김장한은 덕혜옹주를 고국으로 불러 달라고 간청한다. “혁명 정부를 지지하진 않습니다”라고 전제한 후 부탁을 한다. 굳이 이런 대사를 넣은 건 지금의 젊은 관객을 의식한 게 아닌가 싶다. 실제 인물인 김을한(金乙漢) 특파원은 친(親)박정희 언론인이었다. 영화는 독립운동가 김장한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저자이며 서울신문 일본 특파원을 했던 김을한을 합쳐서 덕혜옹주를 사랑한 가공의 한 남자로 만들어 냈다.
이 영화의 미덕은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둘러봤던 경복궁과 덕수궁이 이런 아픈 역사를 안고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것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고종의 무능함에 대해 비난을 하지만 과연 그 시대에 세종이 등극하였더라도 험난한 시대의 파고를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 싶다. 이미 외세는 밀어닥쳤고 조선 왕실은 구태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고종의 독살설도 기정사실화한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더니 이번에는 파리 강화회의에 특사를 보내려고 시도하는 고종을 저지코자 일제가 독살한 걸로 영화는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손예진은 ‘비밀은 없다’의 흥행 참패 이후 이번 덕혜옹주가 본인의 배우 인생에서도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펼쳤고 노인역까지도 현실감 있게 보여 주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덕혜와 김장한이 덕수궁을 거닐면서 오열하는 장면은 허 감독의 감성적 연출 재주를 볼 수 있는 신이기도 했다. 물론 이 장면에서 많은 관객이 눈시울을 적셨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후예들이 실제로 목숨을 바쳐 독립을 위해 싸웠고 일제에 치열하게 항거했더라면 영화 ‘덕혜옹주’의 감동은 배가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