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옥진은 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팔려가 최승희 무용단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1945년 귀국해 조선창극단에 입단했고 1948년 고창 명창대회에서 장원을 했다. 이 무렵 박녹주, 임방울, 김연수, 김원술 등을 따라 다니며 판소리를 배웠고 창극 배우로 활동했다.
전남 영광의 한 장터에서 ‘곱사춤’을 추는 것을 전통무용연구가 정병호가 보고 서울 공연을 제안했다. 1978년 영광에서 홀로 외손녀를 키우며 살던 46세의 공옥진은 안국동의 ‘공간사랑’에서 ‘곱사춤’과 ‘심청가’를 공연했다. 관객과 언론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관절을 자유자재로 꺾어 뒤트는 곱사춤은 매우 독창적이었다. 춤에 판소리와 연기를 더해 ‘1인 창무극’을 개발한 것도 큰 화제 거리였다.
당시 한 신문은 공옥진의 곱사춤이 ‘턱 붙은 곱사’, ‘엉덩이 빠진 곱사’, ‘외발 곱사’, ‘소아마비 곱사’, ‘문둥이 곱사’, ‘설사병 앓는 곱사’ 등이었다고 소개하고, “한 슬픈 사연의 여자가 슬픈 춤을 추는데도 사람들은 극장이 떠나가라고 박수를 치고 환호하고 웃음바다를 이룬다”고 공연 분위기를 전했다. 공옥진은 “촌년이 서울 공간사랑에 와서 되게 출세했어라, 잉”하고 익살을 부리면서도,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흥겨울 때 얼마든지 이렇게 노래 부르며 춤도 추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 나의 춤이고 노래이고 재담”이라고 춤에 대한 철학을 밝혔다.
장애인의 모습을 본뜬 춤을 추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공옥진의 남동생은 어려서 두레박질을 하다가 우물에 빠졌는데 그 충격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춤은 말을 잃은 동생을 위한 것이었다. 장애인을 ‘흉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옥진은 장애인의 희로애락을 표현하기 위해 놀라운 수련 과정을 거쳤다. “저수지 옆 빈터를 무대로 앞산을 관중으로 생각하고 미친 듯이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하며 연습했고, 다리 밑에 사는 거지·나환자·장애인을 찾아가 같이 장구치고 춤추며 “그들의 동작을 배우고 정신세계를 호흡”했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크게 호평을 받았다.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링컨센터에서 단독 공연을 했다. 영국, 중국, 일본 등 해외 공연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0년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1인 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 눈감지 않고 그것을 예술무대에서 재현하고자 했던 최고의 춤꾼 공옥진은 2012년에 생을 마감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