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도널드 트럼프처럼 천박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화 정책(마치 그녀의 부친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반공(反共), 대공(對共) 정책처럼 이념적으로 편향되기 이를 데 없는)에 다함께 맞서 싸울 듯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절대적인 심복(心服)이었던 서병수 부산시장의 술수에 말려, 아니 그의 고도의 전략대로 영화계는 ‘先영화제 정상화인가’ 아니면 ‘정권과 시 당국의 정치적인 사과부터 선행돼야 하느냐’를 놓고 둘로 갈라졌다. 그리고 조선시대 동인·서인과 남인·북인, 노론·소론식(式)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목소리로 나뉘었다.
그런 가운데 불과 얼마 전에는 영화제의 수석 프로그래머인 김지석 씨가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돌연 사망하기까지 했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충격을 넘어 그나마 실낱처럼 이어져 있던 영화제 복구와 복원의 가능성마저 끊어 놓았다.
이제 그 누구도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난 20여 년의 명성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제를 만들기 위해 헌신을 다했던 인물들은 그러니, 이제 역할을 다한 셈이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퇴출시킨 만큼(이명박은 4대강의 환경오염 문제로 언젠가 법적인 추궁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영화계도 ‘스스로들’이 ‘스스로들’을 축출하는 대단위의 장(章)을 써내려 가야 할 것이다. 영화제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인 양, 온갖 문화적인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처럼 구는 것 역시 치졸한 행태일 뿐이다. 영화제는 영화제일 뿐이다. 사람까지 죽어 나간 마당에 이제 판을 새로 짜야 할 터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넘쳐 나고, 그만큼 걱정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우려하는 건 ‘그가 과연 끝까지 잘해 낼까’라는 의문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런 그를 두고, 지지율이 바닥임에도 불구하고 반대파들이 ‘까마득한 공룡 시대 때’ 치러졌던 총선 결과의 의석 수만 믿고 끊임없이 ‘흔들기’를 시도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총리, 장관 인선에서부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 일본군 위안부 쟁점, 북한 미사일 사태 등등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위를 걷는 느낌이다. 게다가 생활 경제는 엉망이다. 있는 자만이 먹고사는 아주 ‘드러운’ 세상이다. 이건 젊은이들식(式) 표현이다. 하지만 저잣거리에 나가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얘기이다. 우리 사회의 깊은 계급, 계층적인 양극화 문제를 그가 어떻게 풀어 낼 것인가.
그러니 영화가 끼어들 틈이 없다. 이명박·박근혜 때는 그때대로 “문화가, 영화가 도통 무엇이냐”는 멸시를 받았다. 광대 취급도 그런 광대 취급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대로 또 너무 눈코 뜰 새 없이 화급한 문제 탓에 문화와 영화를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 역시 판을 바꿀 때이다. 이럴수록 정치 지도자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마치 하릴없는 양, 아무런 정치적인 목적이 없는 양,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러 다니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요즘 좋은 영화가 한두 가지인가. 화제를 모으고 있는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는 아직 ‘그’가 차마 보지 못할 것이다. 그건 그냥 패스해도 된다. 정윤철 감독이 만든 ‘대립군’ 같은 작품은 한 국가의 지도자가 어떤 품성으로 성장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을 만할 것이다. 게다가 나름 재미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럽 정상(頂上)과 언론들로부터 일제히 ‘미치광이’라는 소리를 듣는(이러기도 참 힘들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도널드 트럼프를 곧 만난다고 한다. 그때 그가 얼마 전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박스오피스 1위를 한 영화 ‘겟 아웃’을 얘기할 줄 알면 얼마나 멋있겠는가. 거기에 덧붙여서(아주 ‘문재인스러운’ 억양으로) “그게 사실은 1967년에 스탠리 크레이머가 만든, 시드니 포이티에 주연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당신 시대에 빗대어 만든 거라죠?”라고 하면 아마도 세계 미디어에 대서특필(大書特筆)될 것이다. 당장 똑똑하고 명민하며 위트와 유머를 아는 지도자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그냥 문재인 대통령이 지금처럼 끝까지 잘해 나가고 버텨 내기를 바랄 뿐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쑥대밭이다. 문화부 장관에게 영화계의 새로운 수장(首長)을 빨리 임명하라고 독촉 좀 해주셨으면 좋겠다.
무리하지 마시고, 명령까지 내리지는 마시고, 수석 보좌관 회의 때처럼, 어느 날 도종환 장관과 셔츠 차림에 커피 한잔하시면서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빨리 영화 같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아니, 영화가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