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책을 주도하고 이끌어 나갈 영화진흥위원회만 봐도 그렇다. 현재 위원장이 공석이다. 지난 5월 새 정부가 들어선 직후 김세훈 전 위원장이 사표를 냈고 신임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를 수리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신임 영진위 위원장에 대한 이런저런 하마평이 끊이지 않았지만, 쉽사리 빠른 결정이 내려지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 영화계의 여러 현안에 대해 이렇다 할 발 빠른 조치가 유보되고 있다. 영화인들의 조급증이 확산되고 있는 이유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루빨리 장(長)이 결정되고 임명됨으로써 영진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는 다름 아닌 신뢰 회복이다. 사실 지난 9년간, 조금 더 좁히면 지난 4년간 영진위는 철저하게 불신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강한섭 전 위원장은 공공기관장 평가에서 최하위 점수를 받으며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고, 그 뒤를 이은 조희문 전 위원장은 아예 사기횡령 사건에 연루돼 구속까지 되는 초유의 사태를 빚기도 했다.
자국 영화 진흥 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 정책 등등이 모두 다 후퇴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영진위도 블랙리스트의 폭탄을 맞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일이 올바로 돌아가지 못했음은 명약관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9년간 영진위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새 영진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영화인들로부터, 더 나아가 국민 대중들로부터 신뢰를 다시 얻는 일이다.
그러니 이른 시간 내에 영진위 위원장을 임명하는 것이 옳다. 그건 정말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이다. 지금 공백이 너무 길다. 영진위는 총 9인의 위원회로 구성되며 당초 위원장은 9인 위원 간 호선(互選)을 통해 선임됐으나, 이명박 정부 때부터 이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직접 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게 더 나은 방법인지 지금 그걸 논할 계제가 아니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닌 것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영진위가 나서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투자배급 사업체와 극장 유통망을 동시에 소유하는 수직계열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이에 따라 극단화되고 있는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또 어떻게 해소해 나가야 하는지 등등 영화계의 중론을 모아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두 정부가 말소(抹消)의 지경까지 이르게 한 영화 문화의 다양성을 복구하고, 작은 상업영화를 비롯해 이른바 예술영화, 독립영화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어떤 시스템으로 복원해야 할 건지에 대해서도 중지를 모아야 할 때이다.
현행 ‘영화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방향으로 개정돼야 할지에 대해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이루어야 할 때이다. 언제까지 법률상 용어에 ‘비디오’라는 명칭을 쓸 것인가. 지금 비디오를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루에만도 몇 번이나 세상이 변하고 있는 이 디지털라이징 시대에, 이 미디어 융복합 시대에, 심지어 스크린이 사라지고 대형 LED TV가 극장을 대체하는 이런 시기에, 언제까지 구태의연한 영상 개념을 법적 조문으로 규정하고 있을 셈인가. 이 모든 패러다임의 변화와 그 논리를 영진위가 주체가 돼서 이끌어가야 할 시기이다. 너무나 할 일이 많고, 첩첩산중인 시기이다. 그런데 아직도 영진위 위원장은 공석이다.
한국 역사에 있어 거의 처음으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정부와 그에 걸맞은 지도자가 탄생했다. 새 정부를 기다렸던 만큼 영화계에서는 새 영진위의 빠른 구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다가 골든 타임을 놓칠까봐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계마저 그래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