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金遷)의 어머니는 고려 고종 말~충렬왕 때의 사람이다. 명주(溟州, 현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아버지는 고을 향리인 김자릉(金子陵)이다. 그녀는 호장(戶長) 김종연(金宗衍)과 결혼하여 김천과 김덕린(金德麟), 두 아들을 두었다.
당시는 몽골과의 전쟁기로 몽골인들은 수많은 고려 사람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갔다. 그녀와 작은아들 역시 포로가 되어 원나라 동경(東京)의 몽골인 집에서 각각 노비로 일하게 되었다. ‘배고파도 먹지 못하고, 추워도 입지 못하며, 낮이면 밭 매고, 밤이면 절구질하는’ 고생스러운 삶이 계속되었다.
무려 14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군관인 습성(習成)이라는 사람이 고려에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아들 김천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습성은 고려에 들어와 시장에서 사흘 동안이나 “명주 사람이 있느냐”고 외쳤다. 마침 아들 김천의 친구였던 정선(旌善) 출신 김순(金純)이 있어 김천에게 편지를 건네줄 수 있었다.
편지를 본 김천은 어머니의 몸값을 치르고 데려오고자 은을 꾸어 서울로 올라갔다. 조정에 어머니를 찾으러 원에 가겠다고 신청했으나 허가해 주지를 않았다. 김천은 무려 6년을 서울에서 거지꼴로 버티며 원에 갈 방도를 구하다가 마침내 승려 효연(孝緣)의 도움으로 가게 되었다. 북주(北州) 천로채(天老寨)에 있는 원나라 군졸 요좌(要左)의 집을 찾아가니 한 노파가 나와 절을 하는데 누더기 옷에 머리는 쑥대머리요 얼굴에는 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통성명 끝에 서로를 확인한 모자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녀는 김덕린 역시 이웃에서 종살이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러나 김천이 가져온 돈으로는 두 사람을 다 속신(贖身)할 수 없었다. 그나마 요좌는 몸값을 올려 부르며 속신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김천이 애걸복걸한 끝에 은 55냥을 주었고, 드디어 그녀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장군 김방경(金方慶)이 원나라에 왔다가 김천 모자를 보고는 칭찬과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김방경은 원나라 총관부에 부탁해 증명서를 교부해 모자가 식사와 숙사를 제공받으며 귀국하게 하였다.
아내의 귀환 소식을 들은 김종연은 진부역(珍富驛)까지 마중 나가 20년 만에 부부가 재회하게 되었다. 친정아버지 김자릉은 나이 79세였는데 딸을 보고는 너무 기뻐 땅에 엎어졌다. 다시 6년이 흐른 뒤 김천은 동생도 속신하였다. 두 형제는 몇 해 뒤 빚을 다 갚고 종신토록 효도하며 살았다.
이 이야기는 전쟁의 비참함과 함께 감동스러운 가족애를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녀와 남편이 다시 부부로 살았다는 점이다. 병자호란 때의 환향녀(還鄕女)들이 단지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당했음을 생각해 보라! 여기서도 조선과 다른 고려의 성 관념이 보인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