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파월이 제17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에 내정됐다. 내년 2월 재닛 옐런 현 연준 의장의 뒤를 잇게 되는 파월은 미국의 경제 회복세와 뉴욕증시 랠리를 유지하면서도 안정적으로 긴축정책을 펼쳐나가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안게 됐다.
◇공화당 버전 옐런= 파월은 민주당 정권인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연준 이사로 발탁됐지만 연준 내 유일한 공화당 인사다. 또 그는 이사 취임 이후 지금까지 옐런의 통화정책 결정에 한 번도 반대표를 던지지 않을 정도로 ‘비둘기파’적인 연준의 정책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이에 전문가들은 파월이 점진적인 기준금리 인상과 자산규모 축소 등 옐런과 비슷한 기조의 정책을 펼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강조하는 미국 경제성장 가속화를 뒷받침하고 있는 현 통화정책을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도 공화당 소속인 연준 의장을 두게 된 것이다.
시장도 파월이 연준 의장으로 지명된 것을 환영하고 있다. RBC캐피털마켓의 톰 포셀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파월은 옐런의 ‘공화당 버전’”이라며 “지속성을 원하고 있다면 파월이 쉬운 선택”이라고 말했다. 도이체방크의 피터 후퍼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파월이 주도하는 연준이 옐런 때와 크게 다를 것으로 보지 않는다”며 “이는 시장을 위한 정책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파월은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 연차총회 기간 열린 한 포럼에서 “미국 경제가 예상대로 발전하면 통화정책 정상화는 점진적으로 계속돼야 한다”며 공격적인 금리인상은 없다는 점을 시사했다.
◇금융규제 완화파= 트럼프가 파월을 낙점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금융규제 완화에 우호적이라는 점이다. 파월은 지난달 초 한 연설에서 “금융시장의 문제 해결에 더 많은 규정과 규제가 항상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다”라며 “미국 정부기관은 균형잡힌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월은 올해 초 은행의 위험자산 투자를 제한하는 ‘볼커룰(Volcker rule)’에 대해서 의회가 법안을 수정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우리는 대형 금융기관이 위험자산 투자에 너무 몰두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위험을 헤지하고 시장을 창출하는 것도 원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연준의 규제완화 추진 선봉장으로 지난달 초 정식 취임한 랜들 퀄스 금융감독 담당 부의장을 내세우고 있다. 퀄스는 지난 7월 의회 청문회에서 “금융위기 이후 제정된 규제들은 금융시스템의 안전과 건전성을 개선했다”며 “그러나 현재의 복잡한 상황과 지금까지의 경험을 고려하면 일부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파월의 금융규제에 대한 견해는 퀄스와 같다며 둘은 또 사모펀드 칼라일그룹에서 같이 일한 동료였다고 소개했다. 파월은 친구 사이인 퀄스 부의장의 금융규제 완화 노력에 협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파월은 지난 6월 상원 은행위원회 청문회에서 금융규제 완화 계획에 대해 “이는 꽤나 잡다하다”며 “일부 아이디어는 내가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혀 트럼프 의견을 무조건 수용하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중앙은행 독립성 지킬 수 있을까= 파월이 직면한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정부나 의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정치적 위협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가 파월의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에스와르 프라사드 코넬대 교수는 “연준 독립성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달러화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며 “독립성이 훼손되면 높은 인플레이션과 금융시장 불안정을 촉발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WP는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 이후에야 연준이 금리 결정 등에 있어서 견실한 독립성을 인정받았으나 트럼프와 공화당 의회 지도부가 이를 뒤집으려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린스펀 전 의장은 미디어를 활용하거나 의회 내 자신의 지지자들을 확보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연준의 독립성을 지켰다며 파월도 그런 마키아벨리적인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