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회생 노력도 무위로 돌아가고, 노키아 휴대폰 사업은 2013년 마이크로소프트(MS)에 팔리는 신세가 됐다. 노키아는 지금 네트워크 장비와 특허 라이선싱 업체로 남아 있다. 노키아 전성기, 핀란드 수출의 20%, 법인세 세수의 23%를 떠맡으면서 성장 기여도가 4분의 1에 이르는 절대적 존재였다. 노키아 몰락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친 2009년 핀란드 경제성장률은 -8.7%로 후퇴했다. 갈 곳 없는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핀란드 경제는 놀라운 복원력을 보였다. 2010년과 2011년 2%대의 성장을 일궜다. 유로존 침체로 2012년 이후 4년 연속 뒷걸음쳤지만, 2016년 이후 성장궤도를 되찾았다. 무너진 노키아를 떠난 수천 명의 기술 인재들이 창업에 나서 스타트업 생태계를 만든 게 원동력이었다. 수백 개 벤처기업들이 노키아의 빈자리를 메웠다. 세계를 휩쓴 모바일게임 ‘앵그리버드’의 로비오, ‘클래시오브클랜’의 슈퍼셀,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의 스포티파이 등이 대표적이다. 핀란드에서는 지금 매년 4000개 이상의 혁신 스타트업이 만들어져 저마다 ‘유니콘’을 향해 달려간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노키아 몰락이 핀란드의 이득”(Nokia’s Losses Become Finland’s Gains)이라고 쓰기도 했다.
스타트업 경제로 전환한 성공요인의 분석은 많다. 기술혁신 역량을 활용한 정부의 신산업 지원과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규제개혁 등이 첫손에 꼽힌다. 특별할 게 없다. 우리에게 혁신역량이 부족하지 않고 규제혁파의 의지가 없지도 않다. 정작 핀란드 부흥의 핵심 자산은 벤처를 키워낼 창업안전망 등 사회자본과 제도·문화 인프라, 사유재산 보호로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장경제의 자유, 개척과 도전의 기업가정신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혁신의 접근방식이다. 주한핀란드무역대표부 김윤미 대표가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를 짚는다. 첫째, 핀란드의 성장정책은 정부가 기업보다 앞서 신산업 장애물인 규제를 파악하고 미리 없애는 것부터 시작한다. 아무리 기업이 하소연해도 정부는 규제개혁의 말만 앞세우고 꿈쩍도 않는 한국이다. 둘째, 규제와 간섭을 제거해 시장의 판을 만들어 준 뒤의 지원정책이 거꾸로다. 핀란드에서 스타트업의 자본조달과 투자유치는 그들 자신의 몫이다. 스타트업이 스스로 시장에서 경쟁력을 검증받은 후 세계화로 진전되는 단계에 비로소 정부가 나서서 돕는다. 우리는 이곳저곳 돈부터 쏟아부어 세금을 낭비하고, 기업이 커지면 크다는 이유로 새로운 책임을 지우고 규제의 칼을 들이댄다.
핀란드의 가장 큰 자산은 정부의 시장에 대한 확신, 시장의 정부에 대한 신뢰다. 스타트업 혁신과 기존 산업의 이해가 충돌하는 것을 막고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는 바탕이다. 우리에겐 결핍된 것이다. 핀란드는 요즘 스마트 헬스케어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의료정보의 2차 활용을 허용하는 ‘바이오뱅크법’ 제정으로 이 분야 스타트업들이 대거 출현하고, 글로벌 기업들이 몰려들고 있다. 한국에서 이 사업이 추진된 것은 핀란드보다 훨씬 앞선 2008년이었다. 하지만 의료정보 소통을 차단한 개인정보보호, 이익집단 반발에 원격진료조차 가로막힌 의료법 규제로 주저앉은 상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주 핀란드와 스웨덴, 노르웨이를 순방했다. 혁신과 성장, 복지의 선순환을 이뤄낸 모범국가들이다. 많은 스타트업, 벤처기업인들도 동행했다. 성공 경험을 배우기 위함이다. 그랬다면 겉모습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진짜 비결이 뭔지,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제대로 습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알고도 바꾸지 않는 게 가장 바보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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