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의 한 남자가 맞은편의 친구에게 묻는다. “경술국치가 뭐여?”, “그것도 몰라? 한일합방 된 날 아녀?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를 꼴까닥 삼켜 버린 날이랑게.” 엊그제 전주 막걸리집에서 듣고 본 풍경이다. 대답을 한 사람의 표정이나 어투로 보아 애국애족정신이 충만한 줄은 충분히 짐작하겠으나 그가 사용한 ‘한일합방’이라는 말은 문제가 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날을 어떤 사람은 ‘합방’, 어떤 이는 ‘합병’, 또 어떤 이는 ‘병탄’이라고 한다. 도대체 어떤 말을 사용해야 할까? 합방은 ‘合邦’이라고 쓰며 ‘합할 합’, ‘나라 방’이라고 훈독한다. ‘한일합방’은 한국과 일본이 쌍방의 합의 아래 평화적으로 나라를 합쳤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긴 말이다. 당연히 사용해서는 안 될 말이다. 합병은 合倂이라고 쓰며 ‘倂’은 ‘아우를 병’이라고 훈독한다. ‘竝’이나 ‘並’과 같은 글자이다. “둘 이상의 조직이나 단체, 국가가 서로 합친다”는 뜻이다. 역시 당사자 간의 합의 아래 합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한일합방보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한일합병도 한국과 일본이 합의하에 합쳤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역시 사용해서는 안 될 말이다. 병탄은 ‘倂呑’이라고 쓰며 ‘呑’은 ‘삼킬 탄’이라고 훈독한다. 병탄은 “남의 물건이나 나라를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듦”이라는 뜻이다. 일본은 우리를 강제로 병탄했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병탄’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일본의 잘못을 끈질기게 상기시키고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그럼에도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 때에서야 ‘합방’, ‘합병’이라는 말을 피하고 비로소 ‘병탄’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광복 후, 일제를 청산하지 못한 정부는 학교에서도 줄곧 ‘한일합방’이라고 가르치게 했고, 교과서에도 ‘합방’이라고 썼다. 막걸리집의 사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합방’이라는 말을 쓴 것도 이 때문이다. 참 한심한 세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