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형광펜으로 밑줄까지 쳐 가며 달달달 외웠던 교육이론서 ‘에밀’의 저자 장 자크 루소는 정작 자신의 다섯 자녀 모두를 고아원에 버렸다. 당시 고아원에 들어가 성년까지 살아남은 비율이 5%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루소는 최악의 아버지이다. 본인이 반해서 쫓아다니다 결혼한 세탁부 출신 아내 테레즈에겐 “천하고 무식한 계집종”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노동해방을 부르짖었던 카를 마르크스의 이중성에도 혀를 내두르게 된다.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한 그는 자신의 가정부에게 한 푼의 임금도 주지 않고 45년간이나 착취했다. 심지어 하녀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자기 아들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사창가를 드나든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 여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은 여성해방 주창자 헨리크 입센… ‘지식’ 너머 ‘어둠’ 속 인물들에게 드는 배신감에 속이 울렁거린다.
변론의 기회를 준다면 이들은 뭐라고 변명할까? “나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당신도 그랬을 것이다”, “당시 지식인들은 다 그러고 살았다” 정도의 사람 냄새 나는 단순한 답변이면 좋겠다. 온갖 이론을 갖다붙이며 잘난 척한다면 그들 스스로 더 비참해질 테니까.
‘n번방’에 모인 사람들의 두 얼굴을 상상해본다. 악마의 마음으로 영상에 탐닉한 26만 회원은 분명 멀쩡한 모습으로 생활했을 것이다. 다정한 남편으로, 자상한 아빠로, 성실한 직장인으로, 순수한 청년으로, 심지어 고결한 종교인으로…. 하지만 가증스럽게도 얼굴이 안 보이고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는 연약한 상대를 골라 협박하고 착취했다. 영혼이 파괴되어 악마로 변해 가는 줄도 모른 채. 그 중심에 선 ‘박사’ 조주빈은 정의로운 청년의 모습으로 어린이를 포함해 일흔 명이 넘는 여성의 인격을 살해했다. 그의 괴물 같은 이중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겉 다르고 속 다르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이 딱 어울리겠다. 겉만 봐선 모르는 게 사람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쾌하다. 이럴 때 많은 이들은 “속상하다”라고 표현한다. [속쌍하다]라고 발음하는 ‘속상하다’에는 상처를 뜻하는 한자 상(傷)이 들어 있다. 즉, ‘속상하다’는 마음에 상처가 생겼다는 뜻이다.
음식이 상하면 버리면 되고, 몸은 상하면 치료받으면 된다. 그런데 속이 상하면 모든 것이 힘들어진다. 속상한 감정은 얼굴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한 우울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속까지도 상하게 한다. 그러니 마음이요, 감정이며, 기분인 ‘속’은 그 누구도 상하지 않았으면 한다. 혹 주변에 속상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감싸안고 위로해 줘야 한다.
세상이 살 만한 이유는 아름다운 ‘두 얼굴’을 가진 이들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츤데레’라는 신조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겉으로는 쌀쌀맞아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잘 챙겨주는 속이 깊고 다정한 사람을 뜻한다. 이처럼 겉과 다른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을 읽었을 땐 속이 먹먹하고 짠하고 뭉클하다. 먹먹함, 짠함, 뭉클함은 속이 상할 때처럼 처음엔 찌릿하지만 두고두고 나를 따뜻하게 해주는 고마운 감정이다. 나태주 시인의 시 ‘두 얼굴’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처럼.
“주머니를 뒤지고 지갑을 뒤져도 돈이 나와주지 않는다//그래도 딸아인 기대에 찬 얼굴이다(아빠는 언제나 힘이 세고 부자니까!)//깜깜해진 아빠의 얼굴 아빠는 무너진 하늘이다 찢어진 우산이다//그래도 딸아인 여전히 아빠의 주머니 속을 믿는 눈치다// 아직은 믿을 만한 구석이 아빠에게 남아 있기는 남아 있는 걸까?//그래, 아무리 무너진 하늘 찢어진 우산일망정 없는 거보다 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