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연휴기간, 방에서 뒹굴거리다 우연히 접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금방 빠져든 이유는 그래서 좀 남달랐다. 주인공 ‘찬실이’(강말금)는 집도 없고, 남자도 없고, 갑자기 일마저 똑 끊겨버린 40대 독립영화 프로듀서다. 세상이 자기를 버렸다고 원망하면서도 생계는 꾸려야 했기에 친하게 지내는 배우 ‘소피’네 가사도우미로 취직한다. 여기서 우연히 만난 소피의 불어 선생님 ‘영’과 거세된 줄만 알았던 연애의 불꽃을 태우는 듯했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다. 힘들 때마다 나타나는 장국영 닮은 유령(영화 ‘아비정전’의 오마주인 듯)이 그나마 그녀에게 위안이 될 뿐. 새로 이사간 집주인 할머니(윤여정)는 죽은 딸이 생각나는지 찬실에게 살갑다.
할머니가 가끔씩 내 뱉는 말들은 수첩에 적어 둬야 할 정도로 주옥이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라든지, 한글을 깨우쳐 처음 지은 시의 제목이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 오면은 얼마나 좋을까요?”가 그것이다.
무엇보다 영화가 심금을 울렸던 건 시네필로 살아오며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필자의 가슴 아린 추억들을 소환해 냈다는 점이다. 현학적이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당시 정성일의 영화평론, 지금은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의 영화음악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던 따뜻한 목소리, 망고 리듬에 맞춰 러닝셔츠 바람으로 춤을 추는 장국영, 지금도 또렷히 기억나는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 마지막 스틸 컷 등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내 짝사랑 연인이었던 ‘영화’의 소중한 편린들이었다. 요즘 젊은이에게 이 영화는 어떻게 다가올지 몹시 궁금하다.
박준영 크로스컬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