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유쾌한 상상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지는 않는 것도 현실이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물론이고 코로나 이전에도 한국 사회에서 그 누군가는 학교와 직장, 그리고 여가 및 재충전 생활을 즐기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3월 31일 대법원의 한 확정선고판결이다. 대법원은 한 청년의 이른바 존속살해 혐의 기소에 대한 4년 징역형 원심 확정하였다. 일명 ‘간병살인 영케어러(young carer) 사건’으로 불리는 이 판결은 우리 사회가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기획하는 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회적 신호등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른 간병살인 영케어러의 존속살해 혐의 사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코로나가 다시 확산되던 2020년 9월, 공익근무를 위하여 대학을 휴학한 21세 한 청년은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119 구급대의 전화를 받고 바로 병원에 갔고, 아버지의 뇌출혈 응급수술 동의서에 서명하였다. 당시 56세였던 아버지는 수술 후 의식은 돌아왔으나 오른쪽 팔과 다리만 조금 움직일 수 있었고 음식 섭취와 대소변 조절은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해고된 이후 일용직 건설노동자로 일하다가 자동차 부품공장에 재취업한 지 1개월 만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가출하고 현재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30만 원의 집에서 아버지와 둘이 살아온 청년은 아버지가 쓰러진 이후 다음 해 1월까지 약 5개월간의 병원비 1500만 원, 그리고 이후 3월까지의 요양병원비와 간병비 등 총 약 2000만 원에 대해, 거의 왕래가 없었던 삼촌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밀린 월세, 통신료, 도시가스료의 부담은 여전히 청년에게 있었다. 지난해 4월 23일 요양병원에서 집으로 아버지를 옮긴 후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아버지 간병, 그리고 금융기관의 채무 독촉장의 스트레스를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5월 2일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청년은 다음 날인 3일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았고, 5월 8일 119대원과 경찰이 집으로 와서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고 경찰서로 갈 때까지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간병살인 영케어러 사건은 한국 사회에 이미 깊숙이 자리 잡은 간병절벽과 돌봄절벽에 대한 사회적 대응의 시급함을 다시금 일깨운다. 비단 영케어러의 문제는 아니다. 노노(老老) 간병살인 또는 시니어케어러의 비극 역시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 2018년 7월 70대 노모의 간병을 도맡은 아들의 존속살해, 같은 해 12월 70대 치매 노모에 대한 40대 딸의 존속살해 및 자살, 2019년 2월 80대 치매 노부에 대한 49세 아들의 존속살해 및 자살, 같은 해 4월 치매 아내에 대한 80세 남편의 배우자살해, 9월 뇌졸중과 고관절 골절의 40대 딸에 대한 70대 노모의 비속살해 등 이미 커다란 사회적 대가를 치렀다. 2017년 치매국가책임제를 통하여 치매환자 가족에 대한 돌봄부담 경감제도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타까운 치매간병 비극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더욱더 많은 노력과 함께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2021년 12월 정부는 취약계층 중심 코로나 격차 완화 지원방안을 발표하였다. 그중 돌봄영역을 살펴보면 아동, 노인, 장애인과 더불어 영케어러에 대한 지원 방안이 포함되어 있다. 청소년 또는 청년이 가족돌봄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실태조사를 추진하여 지원체계를 개발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한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2022년 3월 만 34세 이하 청소년과 청년 전수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5월부터 가족돌봄 청년들에게 지원을 제공한다고 한다.
반가운 대응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맞춤형 지원’의 인식 접근법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치매국가책임제의 한계가 치매에 국한되어 소위 맞춤형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이번에도 영케어러의 가족돌봄에 국한되어 설계되고 있음은 유감이다. 생애주기와 건강 및 기능수행 정도, 그리고 물리적 사회적 환경에 따라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그 가족의 연령과 소득에 상관없이 언제든 돌봄을 보장받아야 한다. 뉴노멀 돌봄사회가 토대로 삼아야 패러다임은 보편적 돌봄이어야 한다. 그래야 간병절벽과 돌봄절벽으로부터 모든 이를 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