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세라의 창업 자체가 철학의 산물이었다. 가고시마(鹿兒島)대학에서 유기화학을 전공한 그가 최초로 취업한 곳은 고압용 초자 제조업체였던 마쓰가제(松風)였다. 영업은 물론이고 개발, 심지어는 노조와의 문제에서도 그는 발군의 존재였다. 그런데 입사 4년째인 1959년, 파키스탄의 애자공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는 이러한 조치가 비명문대 출신이 받은 부당한 대우라고 판단해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짐을 쌌다. 가진 것이라고는 27세의 나이, 300만 엔의 자본금에 세라믹기술이 전부였다. 혈기가 넘친 한 청년은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해 회사를 세웠고 이 회사는 종업원 8만 명, 매출1조8000억 엔(약 18조 원)의 세계적 기업으로 커졌다.
창사 이후 단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는 교세라의 극적인 변화는 통신사업 진출, 그는 “독점보다 경쟁을 통해 통신비가 싸지면 국민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철학에서 본업과는 무관한 사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그리고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자신의 사심(私心)이 이 결정에 개입된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1984년 설립된 KDDI(第2電電, 제2전신전화)는 현재 일본 2위의 이동통신기업으로 성장했다.
민주당이 집권하자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는 이나모리 회장에게 일본항공(JAL)의 경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2010년 당시 JAL은 2조3000억 엔이라는 일본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부채를 안고 파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나모리가 경영을 맡고 1년 만에 매출 1조4000억 엔, 영업이익 1884억 엔을 기록하며 극적으로 부활했다. 그리고 2012년 9월에는 2년 8개월 만에 도쿄증시에 재상장했다. 그의 회장 취임조건은 무보수에 3년의 단임, 회사를 살려야 근로자들이 일하고 그래야 가정이 살고 나라가 잘 된다는 철학을 실천하겠다고 했다. 그의 이런 철학이 있었기에 전 직원의 3분의 1에 달하는 1만6000명의 정리해고가 있었어도 일본항공은 흔들리지 않고 정상궤도로 이륙할 수 있었다.
사람이 주인이라는 ‘인본주의(人本主義) 경영’은 이나모리 경영철학의 기본이다. 그래서 한국의 경영자 중에는 선경(현 SK)그룹의 최종현 회장과 가까웠다. 최 회장의 경영원칙 중 으뜸도 ‘인간 위주의 경영’이었다. 철학을 공유한 두 회사는 교세라의 ‘아메바 경영’과 선경의 ‘SUPEX 추구’ 간 상호교류를 갖기도 했다. SK그룹에서 당시 교세라 기술을 바탕으로 한 ‘SKY’란 이동전화기기를 생산한 것도 공유된 철학을 바탕으로 한 사업의 실천이었다. 2004년 이나모리 회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SK를 일부러 찾아 최태원 회장과 만났다. 그리고 ‘행복’을 주제로 두 회사가 인류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자고 의기투합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나모리 회장은 생각이 많은 경영자였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수십 권의 책으로 출간해 세상과 나누어 가졌다. 일하는 자세를 다룬 ‘왜 일하는가’는 지금도 널리 읽히는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책의 출간을 통해 머리 밖으로 나온 철학은 자신의 기업에서 경영을 통해 실천됐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무대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려고 했다. 사재를 출연해 세이와주쿠(盛和塾, 1983년)와 이나모리재단(1985년)을 세우고 기술과 기초과학, 예술 분야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주는 ‘교토상’을 제정한 것도 철학의 실천을 위함이었다.
8월 24일 별세한 이나모리 회장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졌고 회사 측은 장례를 마친 8월 30일에야 그의 부음을 공표했다. ‘경영의 신’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스스로의 철학을 실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