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기업 철수해 현금화해도 판결금 지급 어렵기 때문"
尹ㆍ文 대통령 모두 현금화 아닌 외교적 해결 입장
"피고기업 사과 불가하고 日 과거 사죄 유지·계승이 중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판결금을 일본기업 대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지급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1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일의원연맹 회장이자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인 정진석 의원과 외교부가 공동주최한 강제징용 해법 논의 공개토론회에서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은 발제를 통해 그간 4차례 진행된 민관협의회 논의에 따른 정부 방안을 발표했다.
서 국장은 “채권·채무 이행의 관점에서 판결금은 법정채권으로 피고인 일본기업 대신 제3자가 변제 가능하다는 점이 검토됐다”며 “새로운 재단이나 기금을 설립하는 데 추가적인 작업에 드는 절차와 시간을 절감한다는 차원에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바람직한 주체로 의견이 수렴됐다”고 밝혔다. 이어 “원고인 피해자 및 유가족분들을 직접 찾아뵙고 수령 의사를 묻고 충실히 설명 드리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단이 피고인 일본기업을 대신해 변제하는 데에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일본기업 자산을 현금화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판결금 지급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 서 국장은 “강제집행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일본기업들이 한국 내 경제활동 및 자산을 철수해 압류할 자산이 국내에 부재하기 때문에 결국 현금화로 충분히 판결금을 받을지 불분명하다”고 짚었다.
거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일관계 개선을 기치로 세우면서 일본기업 자산 현금화는 막아야 한다는 방침을 낸 이유도 있다. 이는 직전 문재인 전 대통령도 같은 입장이었다.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은 이 자리에서 “차라리 현금화가 되게 내버려 두라는 말씀도 있었지만 지난 정부도 대통령께서 현금화가 바람직하지 않고 외교적 해결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웃 간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을 손 놓고 두고 만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일본기업이 아닌 ‘우리 돈’으로 판결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일본 기업에 재원 조성 기여를 요청한다는 방침이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시인하고 있다. 서 국장은 “당사자가 아닌 재단을 통한 대위변제로 치환한 건 실례라고 생각하지만, 피고 기업의 판결금 지급을 끌어내기 어려운 걸 피해자들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런 강제징용 해법을 전하려 이날 오후 출국하는 정 의원은 일본의 재원 기여를 받아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정 의원은 이 자리에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해결책을 원하지 않고, 강제징용 해결을 위해선 일본정부와 일본기업이 감당할 몫이 분명 있다”며 “일본 정계의 책임 있는 지도자를 만나 이런 뜻을 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과거사를 직시하며 미래로 나아가자는 김대중-오부치 선언 정신을 되살려 양국관계를 가장 좋았던 시절로 되돌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기업과 정부의 사죄에 관해선 일본 내각의 과거 사죄의 재확인과 유지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서 국장은 “피고기업이 전체 강제징용 문제를 대표로 사과하긴 불가능하고 한일 간 과거사 문제가 산적해 일본이 이미 표명한 과거에 대한 통절한 사죄와 반성을 유지·계승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억, 추모, 역사연구, 교육사업, 지원체계 내실화"
재단 "정부안 수용하지만, 특별법 제정 필요하다"
대법원 판결 원고 15명 한정돼 포괄적 해법 촉구
정부도 거론한 '문희상案' 언급…한일 자발적 기금 조성
일부 피해자 측은 정부안도 반대 "사후 기금 출연 담보 없다"
이 같은 방안은 강제징용 문제를 두고 ‘법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를 분리시킨다는 민관협의회 논의에 따른 것이다. 재단 대위변제로 법적 요소를 해소시키고, 역사적 요소는 일본의 과거 사죄를 유지토록 하면서 국내에선 추모와 교육, 지원 강화에 나선다는 것이다.
조 차관은 “역사적, 법적 요인을 분리해 실질적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며 “확정판결 문제에 그치지 않고 기억과 추모, 역사연구, 교육사업, 그리고 지원체계 내실화 등을 정부가 검토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을 직접 만나 의견을 들을 것”이라고 밝혔다.
서 국장은 “기억과 추모, 연구, 중요한 인권 문제로서의 미래세대 교육 부분을 강화하는 것도 도움이 되고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이에 심규선 재단 이사장과 피해자 유족 측인 한문수 이사 등은 정부안을 받아들이되 특별법 제정을 통한 포괄적 해법이 필요하다는 요구를 내놨다. 정부의 ‘재단 판결금 지급’의 경우 재판 승소 피해자에게 한정되기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피해자까지 지원할 법적 장치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심 이사장은 “유족 지원을 위한 특별법, 소위 ‘문희상 법안’ 같은 걸 만드는 데 재단이 앞장서겠다는 계획을 피해자 유족들에게 설명했다”며 “재단 내 ‘특별법 연구지원팀’을 만들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 이사도 “국가의 손해를 막기 위해 고민 끝에 이런 방법을 쓰는 정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대법원 판결 원고 피해자) 15명의 문제를 재단에 맡기는 대신 염원인 특별법 제정을 재단과 국회가 앞장서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특별법 관련 언급된 ‘문희상 법안’은 지난 2019년 문희상 전 국회의장 대표발의로 여야 의원들이 공동발의 해 마련한 안으로, 한일 기업과 양국 국민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조성함으로써 ‘기억·화해·미래 재단’을 설립해 배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이다. 여야가 뜻을 모은 안이었지만 당시 문재인 정부가 채택하지 않아 좌초됐다.
이는 정부에서도 거론했다. 서 국장은 “확정판결 문제 해결 협의는 2018년 판결 이후 지난 정부에서부터 지속됐다”며 “일례로 2019년 6월 한일 양국기업이 자발적 출연금으로 재원을 조성해 판결금을 지급하는 방안이 공개됐다. 이후 소위 문희상 법안이 전반적 해법으로 거론돼 일정 수준 공감대도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정부 해법으로 채택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단 외에 피해자 측에선 ‘재단 대위변제’ 안을 반대하기도 했다. 법무법인 해마루 임재성 변호사는 이 자리에서 “본질을 호도하는 왜곡된 프레임이다. 일본 측의 사과는 사실 인정과 유감 표시가 아닌 기존 담화를 확인하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며 “정부안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더 거쳐야 한다. 일본의 사후 기금 출연을 담보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피해자 측이 반대하는 안을 굳이 신속히 밀어붙이는 이유가 무언가”라고 반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