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물리학자와 지질학자 부자
아버지 루이스 앨버레즈는 수소 거품상자를 개발해 소립자 연구에 기여한 업적으로 1968년 노벨물리학상을 단독 수상한 탁월한 실험물리학자다. 아들 월터 앨버레즈는 지질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석유회사에서 일하다가 고생물학에 관심을 가져 학계로 돌아와 아버지가 근무하는 UC버클리에 자리를 잡았다.
1978년 명예교수로 물러나 여유가 생긴 루이스는 어느 날 아들에게서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화석에 따르면 대멸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6600만 년 전 백악기와 제3기 지층의 경계면에 양쪽과 뚜렷이 구분되는 얇은 점토층이 있는데, 아마도 공룡이 사라진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흥미를 느낀 루이스는 분석에 뛰어난 화학자들을 섭외해 아들과 공동연구에 뛰어들었고 이 층에 희귀 원소인 이리듐이 수십 배 농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이리듐이 지구 밖에서 왔다는 증거로, 추가 연구 끝에 이들은 지름이 10㎞ 내외인 소행성이 충돌하며 흩어진 이리듐이 쌓인 것이고 이때 충격의 여파로 기후가 급변해 대멸종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이 내용을 담은 14쪽 분량의 논문이 1980년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렸다. 그러나 학계는 ‘SF영화 시나리오로나 어울리는 얘기’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듣도 보도 못한 지질학자가 황당한 논문을 저명한 학술지에 실을 수 있었던 건 유명한 아버지의 입김 때문이라는 것이다. 루이스는 이런 논란을 지켜보다 1988년 77세로 작고했다.
그러나 후속 연구가 이어지며 6600만 년 전 점토층의 두께가 멕시코만에 가까울수록 급격히 두꺼워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곳 어딘가에 소행성이 부딪쳤을 거라는 얘기다. 1990년 마침내 멕시코 유카탄 반도 북쪽 경계인 칙술루브의 분지 지형이 지름 180㎞의 거대한 충돌구 흔적임이 밝혀지며 앨버레즈 부자의 가설은 단숨에 정설이 됐다. 오늘날 이 사건은 지질학의 최대 발견으로 여겨진다.
NASA, 소행성에 우주선 충돌 실험
논문이 나오고 42년이 지난 지난해 9월 미항공우주국(NASA)은 소행성에 우주선을 충돌시킨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비유하자면 굴러가는 당구공에 구슬을 맞췄을 때 진행 경로가 의미 있게 바뀔 수 있는가를 확인해본 것이다. 지름 765m인 소행성 디디모스의 주위를 도는 지름 151m인 소행성(엄밀히 말하면 소행성의 위성) 디모르포스를 표적으로 삼았다. 당시 실험이 성공했다는 발표가 나와 화제가 됐다.
지난 1일 학술지 ‘네이처’ 사이트에는 충돌 실험 데이터를 자세히 분석한 결과를 담은 논문 다섯 편이 실렸다. 이에 따르면 질량 610㎏인 골프 카트 크기의 우주선이 초속 6㎞가 넘는 엄청난 속도로 부딪치면서 그 충격으로 소행성에서 100만㎏이 넘는 바위가 떨어져 나가 우주로 흩어졌다. 디모르포스의 질량이 43억㎏인 걸 생각하면 한줌에 지나지 않지만, 작용 반작용의 법칙으로 우주선 충격의 4배에 이르는 운동량이 위성에 미치면서 공전궤도를 바꿔 디디모스 주위를 도는 공전 주기가 33분이나 단축됐다.
이번 실험의 성공으로 미래에 닥칠 수 있는 지구와 소행성 충돌의 위험에서 인류가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지만 언제 일어날지도 모를 일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3억3000만 달러(약 4300억 원)에 이르는 큰돈을 한 번의 충돌로 날릴 가치가 있을까.
우리나라에도 약 5만 년 전 소행성이 부딪치며 생긴 충돌구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2020년 밝혀졌다. 합천군 적중면과 초계면에 걸쳐있는 지름 7㎞인 분지다. 충돌구 규모로 볼 때 약 200m 크기의 천체가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소행성이 대기에 진입할 때 상당 부분 타버리는 걸 생각하면 디디모스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세계에서 확인된 충돌구는 200여 개에 이르러 지구에 상흔을 남길 정도의 충돌이 드문 사건은 아님을 알 수 있다. 5만 년 전 합천에 떨어진 크기 정도라도 인근 수십㎞ 이내 지역은 초토화될 것이다. 소행성 충돌 실험이 드라마틱한 가설을 바탕으로 드라마틱한 해결책을 제시한 잘 만든 한 편의 드라마일 뿐인 건 아니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