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41. '단일시장' 꿈 남기고 떠난 자크 들로르

입력 2024-01-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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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貨 기초 놓은 ‘유럽 건설자’
단일시장 완성이 저성장 극복길

“프랑스의 독주(毒酒)는 왜 독일에서는 아닌가?”

독일의 한 주류 수입업체는 프랑스의 독주 ‘카시스 드 디종’(Cassis de Dijon)을 수입판매하려 했다. 그러자 독일 정부는 프랑스 독주의 알코올 함량이 15~20%로 독일의 32%보다 낮다며 독주가 아니라고 수입 판매를 불허했다. 주류사는 당시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법원인 유럽법원(사법재판소)에 제소해 승소했다. 1979년이다.

흔히 ‘카시스 드 디종’ 판결로 불리는 이 사건은 회원국 간의 다른 제품 기준도 상호인정해야 함을 명시했다. 현재 유럽연합(EU) 단일시장의 기초를 놓은 판례다. 지난달 27일에 자크 들로르 유럽연합 전 집행위원장이 98살로 서거했다. ‘지칠줄 모르는 유럽의 건설자’로 그는 단일시장의 완성에 전념했고 단일화폐 유로의 기초를 닦았다.

비관세장벽 허물고 단일시장 실행

프랑스 재무장관 출신의 진보주의자 들로르는 1985년 EEC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그는 10년간 이 직책을 수행하며 경제공동체를 단일시장에 다가서게 만들었다.

먼저 당시 EEC 회원국들 간의 교역에서는 관세가 없었지만 카시스 드 디종 판례에서처럼 다양한 비관세장벽이 매우 흔했다. 상이한 기술표준을 이유로 다른 회원국의 물품 수입을 금지했다. 들로르는 이런 비관세장벽을 허무는 280여개 정도의 법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1992년 1월 1일부터 회원국 간의 단일시장(내부시장)을 완성한다는 뜻에서 ‘1992년’이라고 불렸다.

집행위원장이 정책과 법안을 제안할 수 있지만 회원국들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들로르는 통합을 이끄는 독일 및 프랑스와 긴밀하게 조율하고 다른 회원국들도 여기에 동참하게 했기에 그의 제안은 단일시장 완성 정책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실행할 수 있게 만든 것, 이게 바로 리더십이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은 ‘유럽’은 오랫동안 경기침체를 겪었다. 당시 EEC 회원국들은 유럽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각종 비관세장벽을 세워 침체를 극복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오히려 침체를 더 오래가게 만들었다.

경제가 활력을 되찾지 않는 한 국제무대에서 EEC의 존재 의미는 점점 더 축소될게 뻔했다. 시대 분위기를 명민하게 파악한 들로르는 단일시장을 완성해야 유럽의 경제가 성장하고 유럽이 국제무대에서 행위자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며 비관세장벽 허물기에 주저하는 회원국들을 설득했다.

이후 단일시장은 유럽통합의 가장 가시적인 성과가 됐다. EU 27개 회원국 간에 상품과 서비스, 자본과 노동이 아무런 장벽없이 자유롭게 이동한다. 회원국 시민들은 다른 회원국에 비자 없이 이주해 취업할 수 있다. 세계의 그 어느 지역도 ‘유럽’처럼 국경을 허물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단일시장이 형성된 곳은 아직 없다.

‘단일시장’은 곧 ‘단일화폐’

이런 단일시장은 단일화폐가 필요하다. 독일의 마르크, 프랑스의 프랑 등 회원국 화폐를 내부 교역에 사용하다 보니 유럽기업들은 환차손에 노출될 위험이 컸다. 단일시장 완성에 매진하면서 들로르의 집행위원회는 ‘단일시장=단일화폐’라는 경제적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EEC 최대의 경제대국 독일은 마르크화의 패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1979년부터 EEC 회원국들은 화폐 간의 환율 변동범위를 상하 2.25%로 제한한 유럽통화체제(EMS)를 운영했다. 이 체제에서 마르크화는 사실상 기축통화가 됐다. 회원국들이 독일과 많이 교역을 했기에 마르크화가 자연스레 달러를 제치고 EEC 회원국 간의 외환시장 개입 통화로 더 많이 쓰였다.

독일의 주저는 그러나 급속한 통일과정에서 누그러졌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갑자기 붕괴하고 독일은 이듬해 10월 3일에 하나의 국가가 됐다. 단일화폐 도입의 이정표가 세워지고 실행에 들어가게 된다. 전쟁의 업보를 쥔 독일이 통일할 경우 2차대전 전처럼 또다시 유럽의 평화를 교란할 수 있다는 우려가 무엇보다도 프랑스에서 컸다. 당시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은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와 수차례 정상회담을 갖고 통일 독일이 계속해서 유럽통합에 함께 할 것이며 일방적인 외교정책을 수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얻어냈다. 독일은 이런 보장의 하나로 마르크화의 패권을 포기해 단일화폐 유로화 출범을 길의 열었다. 대신 독일은 유로화를 관장할 유럽중앙은행이 엄격한 물가관리에 중점을 둬야 함을 관철시켰다. 자국의 경제관리 방식을 유럽차원에 이식했다. 들로르는 이런 과정에서 독일과 프랑스 양국을 중재하고 다른 회원국들의 합의를 이끌어내 유럽 차원에서 단일화폐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다.

▲자크 들로르 전 EU 집행위원장의 장례식이 5일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에서 국장으로 거행됐다. 파리/로이터연합뉴스
▲자크 들로르 전 EU 집행위원장의 장례식이 5일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에서 국장으로 거행됐다. 파리/로이터연합뉴스
“가장 지정학적인 집행위” 이끌어

지난 5일 프랑스 파리에서 들로르 전 위원장의 ‘유럽장’이 치러졌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과 샤를 미셸 유럽이사회(EU정상회의) 상임의장, 회원국의 국가 수반들이 대거 참석해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2019년 취임한 폰데어라이엔은 ‘가장 지정학적인 집행위원회’를 이끌어왔다고 평가받는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속에서 ‘유럽’이 목소리를 내고 인정을 받으려면 기후위기에 적극 나서야 하기에 그린딜을 제시하고 실행해왔다. 2022년 2월 말에 발발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에서도 ‘유럽’은 아직까지 한 목소리를 내며 러시아를 제재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왔다.

그러나 값싼 러시아산 천연가스와 원유가 거의 끊어지는 바람에 유럽의 경제는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올해 1.3%의 성장이 예상된다. 또 2020년부터 3년간 코로나19에 이어 2022년 전쟁 발발로 물가는 폭등했고 회원국들은 어려운 기업들을 지원하느라 보조금을 남발해왔다.

2년 전에 디지털시장법과 디지털서비스법을 공표해 사이버 공간에서도 단일시장을 완성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유럽통합의 건설자 자크 들로르를 떠나보내며 단일시장을 다시 생각해본다. 유럽경제가 재도약하려면 아직도 미완인 단일시장을 완성해야 한다. opinion@etoday.co.kr

대구대 교수(국제정치학)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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