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탈감 해소하면 배려도 필요 없어
사라져가는 ‘여가부’ 운명과도 비슷
최근 스위스를 다녀온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곳의 대중교통비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비싸더란다. 한국에서는 65세 이상이면 지하철이 ‘공짜’요 기차는 30% 할인해주는데, 스위스에는 그런 경로우대가 없는지 역무원에게 물었단다.
스위스엔 노인을 위한 복지제도가 아주 잘 되어 있어, 만일 대중교통비를 할인해준다면 이중의 혜택을 제공하는 셈이니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단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완벽한 노인복지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노인의 지하철 무임승차를 둘러싼 논란 따위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최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의 여성 및 청년 공천을 위한 배려나 양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여성 공천 비율은 4년 전보다 하강 추세요, 청년 공천도 소리만 요란했지 생색내기에 불과할 뿐, 어떠한 진전도 없다는 불만이 비등하고 있다.
이 역시도 기존의 정치 구조하에서 성별 세대별 진입장벽도 없고 불평등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굳이 여성과 청년의 공천 비율을 의식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과 여성과 청년을 위한 혜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실상 이들이 사회적 배제와 차별, 불평등과 불공정의 피해자임을 보여주는 셈이다.
와중에 2022년 대통령 선거 중의 ‘여가부 폐지’ 공약이 새삼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잼버리 운영의 파행에 책임을 지고 퇴임 의사를 표명했던 여성가족부 장관의 사표가 5개월이 지나서야 수리되었다는 소식 덕분에 말이다.
후임 장관 임명은 없고 차관 대행체제로 갈 예정이라는 소식에, 여성가족부를 “형해화(形骸化; 내용물 없이 뼈대만 남은 상황을 의미)”하려는 의도는 멈춰야 한다는 취지의 칼럼이 올라왔다.
지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급작스럽고 생뚱맞게 등장했던 ‘여가부 폐지’가 20대 남성의 표를 끌어당기면서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 앞에서 별다른 이견이 노출되지는 않았다. 그 과정에서 젠더 갈등의 원인을 세심하게 짚어보고 해소 방안을 모색하기보다 서둘러 묻어버린 채, 정부 부처 폐지에만 매달렸던 건 진정 아쉬운 대목이다.
일단 20대 남성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코로나 직전 조사된 국내 대표적 기업 신세대 사원의 젠더 구성을 보면 여성이 51%, 남성이 49%로 나타났다.
언론고시에서는 여성의 약진으로 인해 궁여지책으로 남성 할당제를 실시한다는 소문도 공공연하게 돌았다. 상황이 이러한데 남성은 인생의 황금기에 군복무를 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역차별 아니냐는 것이다.
설혹 성차별이나 성불평등이 존재한다 해도 그건 예전 아버지나 할아버지 세대의 과오인데, 성차별을 해본 적도 없고 남성이라고 대우받아본 적도 없는 ‘나에게’ 책임을 분담하라고 하는 건 불공정하기도 하거니와 불합리하다는 것이 이들의 속내였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1993년 11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불후의 명언과 함께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남긴 말이 하나 더 있다. 검정색과 회색 양복이 물결치는 임원들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친 말은 “여자 뽑아! 여자 뽑으란 말야!”였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삼성은 대졸 여성 공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계열사별 차이는 있었지만 20% 내외의 여성을 뽑기 위해 애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신입사원 중 20%를 차지했던 여성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삼성이 대졸 여성 공채를 시작하기 전 기업의 채용 공고에는 예외 없이 ‘군필자’라는 항목이 뚜렷이 명시되어 있었다. 당시 군대는 남성들 가슴에서 빛나는 훈장이었지 “젊음을 썩히는 곳”이 절대 아니었다.
물론 20대 남성중에도 금수저와 흙수저가 있듯이, 여성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동질적 집단은 아니다. 아주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꾸준히 증가해온 전문직 경영관리직 여성도 있고, 유리천장을 보란 듯이 뚫은 여성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노후 준비도 못한 채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50~60대 중장년층 여성도 있고, 과장급에서 차장급으로 진급할 때 대거 경력단절의 아픔을 겪는 여성의 현실도 있다.
결국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평등 상황 또한 꾸준히 변화해왔음을 충분히 고려해야 했는데, 이를 놓친 건 반성을 요한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를 안고 이름마저 잊혀가고 있는 여가부의 운명을 보자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