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근의 시선] 공영방송의 존재이유를 묻는다

입력 2024-08-13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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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정부·巨野, 방통위 놓고 이전투구
공정방송 거리 먼 꼼수·편법 판쳐
정치 전리품化…더 유지해야 하나

‘문명의 충돌’ 저자로 잘 알려진 새뮤얼 헌팅턴은 1970년대 말에 많은 신생국들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은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에 실패했기 때문이라 지적한 바 있다. 권력이 변동될 때마다 정치제도가 바뀌는 것이 정치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이다. 단점이 많고 불완전한 정치제도라 하더라도, 여러 정권에 걸쳐 유지되어 제도화되면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완벽한 민주주의 제도란 없다. 최초로 국가 통치자를 투표로 선출한 미국의 대통령 선거제도는 정말 모순덩어리처럼 보인다. 한 표라도 이기면 그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방식은 전체 득표수에서 진 후보도 대통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것을 집요하게 문제 삼았다면 지금까지 미국의 대통령 선거제도가 존속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방송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공영방송을 상징하는 영국의 BBC 이사회 구성은 그렇게 치밀하지도 않고, 관행과 배려를 중시하는 영국의 정치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공영방송 이사 자리를 두고 집요한 것을 넘어 치졸하기 그지없는 싸움을 벌이는 우리 정치문화라면 영국의 BBC는 절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수십 명의 정치·사회 단체 대표로 구성된 독일의 공영방송 평의회처럼 공영방송 이사회를 구성하게 하면, 아마도 어떤 단체로 포함시킬 것인가를 놓고 정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높다. 단체들의 대표성을 두고도 이전투구가 벌어질 게 분명하다. 독일이 다수로 구성된 공영방송 평의회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다시는 나치 같은 국가권력이 방송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정치·사회적 동의가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꼼수와 편법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방송통신위원회는 제도화에 실패한 대표적 기구임에 틀림없다. 2000년 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명분으로 여·야 추천으로 구성된 합의제 방송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방송·통신 융합 추세에 대응해 정보통신부와 통합되면서 방송통신위원회가 되었다. 한마디로 집권 여당이 방송·통신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규제기구 구성을 여·야가 분점한 것이다.

하지만 추천방식상 정부·여당이 항상 5분의 3을 확보할 수 있어 사실상 주요 결정에 있어 독임제와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야당 추천 위원이 결정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관련 정보나 절차를 정부·여당이 일방적으로 독점하지 못하게 한다는 견제의 의미는 있다. 어쩌면 이보다 선거에서 패배한 야당에게도 차관급 자리 2개를 배려한다는 현실적 의미가 더 클지도 모른다.

문제는 방송통신위원회가 KBS와 MBC(방송문화진흥회) 같은 공영방송 이사회를 여권 주도로 구성하는 권한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집권 여당이 국회 다수당일 경우에는 괜찮지만, 지금처럼 극단적 여소야대 상황에서는 의회 권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법적 근거도 없이 야·야가 야합해 7:4, 6:3으로 나누어 먹는 현행 공영방송 이사 구성 방식이 모든 갈등의 진앙이다.

당연히 야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영방송 이사 개편을 저지해야 하고, 그 결과가 방송통신위원회를 무력화시키는 전략이다. 일단 여·야가 추천하는 국회 추천 방송통신위원 3인을 공석으로 비워두고, 방송통신위원장을 탄핵해 의결정족수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이런 꼼수로 벌써 세 명의 방송통신위원장이 사퇴 또는 탄핵소추되었다. 꼼수에는 편법으로 대응하는 법. 정부·여당 역시 탄핵 의결 직전에 후임자를 임명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공영방송 이사회 재편에 성공하였다.

이런 편법과 꼼수는 방송통신위원회와 공영방송이 사실상 정치적·사회적 동의가 전혀 없는 형해화된 제도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마디로 정치적 전리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제도가 20년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여·야의 이해득실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마치 헌팅턴이 말한 제도화에 성공한 기구인 것처럼 착각해왔던 것이다. 정치적 전리품이 되어버린 방송통신위원회와 공영방송을 더 이상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본질부터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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