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옥죄는 규제 개혁 절실…민간 투자 저하도 우려
스타트업ㆍ중소기업 투자도 필요…정부 주도 지원 필요
6G 시대 대비하는 '중장기 주파수 정책'도 수립해야
한국 경제의 엔진이던 ICT 산업이 성장 정체에 빠지면서 국가 경쟁력마저 위태로워지고 있다. 이에 인공지능(AI) 시대에 맞는 ICT 정책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전문가 제언이 나왔다.
17일 정보통신정책학회·한국통신학회·한국경영과학회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인공지능 시대, 국가 정보통신기술(ICT)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 방향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신민수 한양대 교수는 "1990년대 이래로 한국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한 IT산업은 최근 내수시장의 포화와 경제성장 기여율의 감소라는 위기 국면에 처해 있다"며 "최근 2010년 이후 들어 경제성장률과 IT 산업 성장률이 동반 하락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모정훈 연세대 교수도 "토터스 미디어가 지난해 발표한 글로벌 AI 인덱스에서 우리나라는 27점을 받았다. 미국이 100점인 것에 비해 4분의 1에 불과하다"며 "대한민국의 혁신은 글로벌 대비 뒤처져 있다. 대한민국은 AI 쪽에서 잘 못 하고 있다"고 직격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ICT 산업을 옥죄는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곽규태 순천향대 교수는 "중복 규제나 과잉 규제에 대한 산업계의 우려가 있다"며 "과거엔 대기업을 억제하는 정책이 맞았을 수 있지만, 현재는 이들이 글로벌 경쟁을 해야 한다. 민간 투자가 절실한 환경이다"라고 했다. 이어 곽 교수는 "특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문화체육관광부, 방송통신위원회를 중심으로 정책 기능이 양분돼 있고, 공정거래위원회와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등도 규제 정책으로 관련 산업을 규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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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교수도 "규제개혁, 정부 역할 개선에 있어 가장 필요한 건 '성장 정책으로의 전환'"이라며 "소비자 후생을 높이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는 산업의 성장으로, 이는 규제 위주의 정책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이종관 법무법인 세종 수석전문위원은 미디어 콘텐츠 분야 내에서 공적 영역과 산업 영역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은 "레거시 미디어에 대한 고강도 규제는 공공성과 공익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는 산업정책 및 규제개선 지체를 일으킨다"고 했다. 또한, 이 위원은 플랫폼 정책의 탈국격 추세를 고려해 보편적 규제와 특화된 규제를 분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공정 경쟁과 이용자 보호 등 '보편적 규제' 차원에선 글로벌과 유사한 규제 수준을 유지해야 하며, 특정 국가에 따른 특화된 규제는 될 수 있는 대로 도입을 지양하거나 자율 규제 체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AI 및 ICT 분야에 정부가 전략적 투자를 단행해야 한다고 봤다. 모 교수는 "AI 인프라는 물론 AI 모델 및 서비스 분야에도 초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정부와 민간의 전략적 분업과 협력은 물론, 정부 차원의 지원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고 했다.
곽 교수는 플랫폼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와, 중소·중견기업의 인공지능전환(AX) 지원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콘텐츠 산업이 타업종보다 매출 규모, 고용 인원 등 기여가 우수한데도 국가 전략산업으로 미지정됐다며, 중장기적 산업 진흥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고위험 고수익 산업이기 때문에, 대기업 등 민간투자가 절실하지만 (정부는) 이들에 대한 지원을 근원적으로 회피하는 산업정책을 고수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부 주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보급 및 저가 서비스 제공' 정책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모 교수는 "정부 주도의 GPU 보급만으로는 글로벌 빅테크 대비 '양적 경쟁'이 불가능하며, GPU 서비스를 저가로 제공할 경우 민간의 인공지능 데이터센터(AI DC) 투자 유인이 상실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민간의 전략적 역할 분담을 통해 정부는 민간이 달성하기 어려운 '학습용 데이터 공급', 'AI 인재 육성' 등을 담당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홍인기 경희대 교수는 다가오는 6G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중장기 주파수 정책이 필요하다고 봤다. 홍 교수는 "전파 특성이 좋은 저대역에서 광대역 주파수를 확보한다면 투자 대비 좋은 커버리지와 성능을 확보할 수 있다"며 "LTE 주파수의 단계적 회수도 추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일각에선 시장 중심의 정책 틀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안정민 한림대 교수는 "가계통신비 인하가 단골 국정과제로 거론되지만, 정부 주도의 인위적인 요금 인하 정책은 현재의 통신 시장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며 "통신사는 단순한 네트워크 제공자가 아니라, 국가 디지털 생태계를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 공급자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정책은 '통신 요금을 낮출 방안'보다는 차세대 디지털 인프라에 국내 통신사가 안정적이고 지속할 수 있게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돼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