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게 왜 이렇게 귀엽지?"
짙은 남색과 회색 조합의 인터넷 창, 뚝뚝 끊기는 그래픽, 기호와 외국어 텍스트를 섞어 만든 이모지…
세기말 감성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곳곳에서 포착되는 요즘입니다. 저해상도의 도트 그래픽,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잘 알고 있는 윈도우 XP 바탕화면까지 이른바 디지털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요소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데요. Y2K 패션이 옷장에 다시금 등장한 것처럼, 1990년대~2000년대 초반의 디지털 화면이 Z세대의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재현되는 중이죠.
재미있는 건 당시엔 '기술의 한계'였던 요소가 지금은 '감성의 언어'가 됐다는 점입니다. 언뜻 보면 촌스러운 요소가 현대의 미학으로 재해석되면서 귀엽고 엉뚱한 감성을 자아내는데요.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픽셀과 기호가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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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셀 아트는 디지털 화상을 구성하는 단위인 정사각형에 최소한의 색을 입혀 그림을 그리는 디지털 아트를 말합니다. 도트 그래픽으로도 불리는데요. 유명 게임 '스타듀밸리'나 '마인크래프트'를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과거 비디오 게임을 만들 때는 게임 화면을 구성하기 위해 화면에 점을 찍어 넣어야 했습니다. 화면의 해상도가 높지 않았던 데다가 그래픽을 처리하는 능력 역시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그릴 수 있는 칸 수와 사용할 수 있는 색깔도 제한적이었기에 원색 등 강한 컬러 구성이 특징인 게임이 출시되곤 했죠. 빨간 모자와 파란 멜빵 바지를 착용한 '슈퍼 마리오'처럼요.
당시 기술적 제약에 따른 산물은 오늘날 감성적 미학으로 부활했습니다. 2016년 출시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인디 게임 '스타듀밸리'의 가장 큰 매력도 픽셀 아트 스타일의 2D 그래픽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고전적인 게임의 느낌을 부각한 데다가 게임 속 배경음악, 효과음도 이에 걸맞은 무드로 연출됐죠. 여유로운 게임 흐름, 형형색색의 콘텐츠까지 다양한 요소가 맞물리면서 PC는 물론 콘솔, 모바일에서 모두 플레이할 수 있는 인기 게임으로 거듭났습니다.
2015년 출시된 '언더테일' 역시 픽셀 아트 스타일을 차용한 대표격 인디 게임입니다. 단순히 캐릭터와 배경만 도트로 찍어낸 게 아니라 감정과 내러티브를 픽셀로 표현, 호응을 얻었죠. 전반적인 연출과 디자인은 SNES(슈퍼패미컴)나 게임보이 스타일을 연상케 하지만 그 안에 멀티엔딩 구조 같은 현대적인 게임 요소가 녹아들어 있어 매력적입니다.
비슷한 시기 출시된 '위처 3: 와일드 헌트', '파이널 판타지 XV', '메탈기어 솔리드 V: 더 팬텀 페인' 등이 정밀한 캐릭터 모션, 고해상도 그래픽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평가를 들은 걸 회상해보면, 픽셀 아트 게임들이 당시 기술의 한계로부터 비롯됐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기술 부족이 아니라 의도된 미학이었다는 거죠.
픽셀 아트는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K팝 시장에서도 이를 적극 활용하는데요. '젠지' 선창하면 'NCT 위시' 후창이 나올 정도로 젠지력을 잘 말아주는 NCT 위시가 이번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위시코어'로도 익숙한 NCT 위시는 지난달 코믹스 콘텐츠 '소원을 빌어줘! 초록별과 우주먼지새의 모험!' 시즌2를 연재했습니다. '소원을 빌어줘! 초록별과 우주먼지새의 모험!'은 NCT의 '꿈' 세계관과 NCT 위시의 음악 및 뮤직비디오 속 소재들을 접목한 코믹스 콘텐츠로, 팬들에게 해석하고 찾아보는 재미를 선사하는데요. NCT 위시가 그린 동물 캐릭터를 픽셀로 구현해 귀엽고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인기를 끌고 있죠. 2017년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호애 작가가 스토리 작업에 참여했으며,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 선정 '한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을 수상한 도트 만화가 'OOO'(정세원) 작가가 만화 각색과 제작을 맡았습니다.
한 땀 한 땀 픽셀을 찍어 만든 캐릭터들도 인기를 끄는 중입니다.
귀여운 듯 하찮은 듯 희한한 너드미를 자랑하는 캐릭터, '안경만두'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지는 안광, 엉뚱한 포즈, 단순하고 무해한 매력은 Z세대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죠.
15일 카카오 이모티콘샵에 출시된 '안경만두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는 하루 만에 인기 이모티콘 순위 1위를 기록했습니다. 이에 앞서 닉스(NYXX)와 손잡고 캡슐 컬렉션을 출시한 후 4일부터 6일까지 무신사 스퀘어 성수 3에서 팝업스토어도 열었는데요. 팝업스토어는 오픈런이 진행될 정도로 관심을 받았죠. 또 지난달엔 비비고 공식 인스타그램에도 등장해 눈길을 끈 바 있습니다.
걸그룹 아이브 멤버 레이의 인스타그램에도 '안경만두'가 등장했는데요. 레이는 평소 아기자기한 이모티콘과 캐릭터 이미지로 인스타그램 피드를 꾸며 '인꾸'(인스타그램 꾸미기), '사꾸'(사진 꾸미기) 최강자로 불리곤 하죠. 래퍼 이영지도 X(옛 트위터)를 통해 "안경만두라는 캐릭터에 빠졌는데 이 친구 어디 태어나서 어떻게 유행됐는지 설명해주실 분 계신가"라며 "진심 너무 귀엽고 머리도 너무 커서 더 정이 간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K팝 팬들 사이에서는 안경을 쓴 자신의 '최애'(가장 좋아하는 멤버) 사진과 안경만두의 투샷을 붙여 게재하는 게 소소한 붐이 일기도 했죠.
1990년대의 상징과도 같은 픽셀 그래픽 기반의 게임, 다마고치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뷰티 브랜드 롬앤과 티르티르는 일본 잡화점인 플라자 한정 상품으로 다마고치 컬래버레이션을 선보여 코덕(코스메틱 덕후)들의 관심을 받았는데요. 뷰티 제품뿐 아니라 보이그룹 스트레이 키즈 공식 굿즈로 제작되는가 하면, 핫플레이스 성수동에서 팝업스토어가 열리는 등 남다른 관심을 받은 바 있죠.
이모티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기존 문자, 숫자, 기호, 특수문자 등 텍스트 기반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이모티콘은 감정(emotion)과 기호(icon)를 합친 말인데요. 이름 그대로 -_-, :), ㅠㅠ처럼 얼굴 표정을 묘사해 감정을 표현합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1982년 9월 19일 카네기멜런 대학교의 스콧 팔먼 교수가 온라인 게시판에 :-) 이모티콘을 사용한 게 최초로 사용된 이모티콘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다만 이는 디지털상에서의 최초 기록이고, 이런 기호와 글자를 조합해서 사람 표정을 표현한 예는 타자기를 이용하여 19세기 말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죠.
'이모지'(emoji)라는 말도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엄연히 말해서 이모티콘과 이모지는 다른 개념입니다. 이모지는 '그림 문자'를 뜻하는 일본어 에모지(絵文字)에서 유래했는데요. 텍스트 기호만으로는 감정을 전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날씨, 음식, 감정, 기호 등을 픽토그램 형태로 만들었죠. 1990년대 후반 일본 최대 이동통신사 NTT 도코모에 의해 만들어져 일본의 휴대전화 문자 서비스에서만 사용되다가, 2008년 아이폰 3G 일본 출시를 기점으로 스마트폰에도 본격적으로 도입됐죠. 2010년, 유니코드 컨소시엄이 이모지 코드 수백 개를 공식 등록하며, 이모지가 국제 표준 문자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은 같은 유니코드 이모지를 저마다 다른 디자인으로 랜더링해 생김새의 미묘한 차이는 있습니다.
이렇게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국제 표준 이모지가 마련돼 있는 데다가, 인스타그램 댓글이나 DM(다이렉트 메시지)로는 움직이는 GIF 스티커, 짧은 영상 등을 보낼 수도 있는 요즘인데요. 적지 않은 Z세대는 '카오모지'(Kaomoji)에 주목하는 모양샙니다.
이모티콘이 가로 방향으로 단순한 표정을 표현했다면 카오모지는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 모양으로, 특수문자와 기호를 섬세하게 조합해 감정을 더욱 디테일하게 담아낸 게 특징인데요. (╥﹏╥), (๑•́ ₃ •̀๑) 등을 예로 들 수 있죠. 이모티콘보다 더욱 복잡하고 길지만, 더 섬세한 얼굴 표현이 가능합니다.
카오모지의 매력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골라 조합하고 꾸밀 수 있는 디지털 수공예와 같은데요. 어쩐지 옛날 문화 같아 촌스럽지만 귀여운, 불편하지만 정성이 담긴 디지털 언어로 기능하죠. 결국 단순히 감정을 보여주는 도구가 아니라, 나만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감성 표현의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Z세대는 유튜브, 틱톡, 트위터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디지털 요소들을 '재구성된 기억'처럼 소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단순한 레트로 유행을 넘어 감정을 디지털적으로 '연출'하는 방식의 변화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요. 정밀한 그래픽과 간편한 이모지가 넘쳐나는 시대 속 오히려 투박한 픽셀과 복잡한 텍스트 기호를 찾는 이들. 더 깊은 감정과 소통 방식을 찾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