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용평가는 24일 미국 관세정책의 현실화로 인해 수출 중심 국내 경제 성장률이 둔화할 것이라며, 관세 영향을 많이 받는 국내 기업들의 신용도 악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날 무디스와 한국신용평가는 웹세미나를 열고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의 국내 산업별 영향을 점검했다. 무디스에 따르면 광범위한 상호관세가 발표되고 우리나라의 2025년 경제성장률 전망은 당초 2.1%에서 1.5%로 0.6%포인트(p) 하락했다. 이는 우리나라가 주요 20개국(G20) 중 멕시코(2.5%p)와 캐나다(1.3%p)에 이어 세 번째로 성장률 저하 폭이 클 것이라는 전망이다.
원종현 한신평 기업평가본부 실장은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공급망 측면에서 미국과 연계성이 높은 수준"이라며 "품목별 관세가 현실화되면 수익성 저하가 불가피하지만, 상대적인 가격 경쟁력 저하 폭이 낮아 신용도에 미치는 악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 실장에 따르면 메모리반도체 대부분은 미국 역외에서 생산되고 있다. 작년 말 기준 메모리업계의 미국 내 생산 시설설비(CAP) 비중은 DRAM 1.7%, NAND 2.3%에 불과하다.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제외하면 메모리는 대부분 범용 제품으로 가격 경쟁력이 중요해 미국 내 생산 비중을 높이는 데 기업들의 부담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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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HBM, 인공지능(AI) 서버용 고용량 메모리 등 AI 전용 메모리는 가격 민감도가 낮은 빅테크 위주로 공급망이 형성돼 있다"면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메모리 업체들의 협상력이 우위에 있다"고 설명했다.
한신평은 국내 철강업계가 트럼프 1기보다 광범위하고 강도 높은 관세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은 유럽연합(EU) 3900만2000톤(t)에 이은 세계 최대 철강 수입 시장 중 하나다. 2023년 미국의 철강재 수입량은 2600만t으로 2위를 기록했다.
안희준 한신평 기업평가본부 실장은 "쿼터 내 무관세가 적용됐던 한국 철강 기업들의 경쟁 여건 저하가 불가피하다"며 "대미 수출의존도가 높은 강관 업체 중심으로 위험성이 높다. 수출 품목이 고수익 에너지용 강관에 집중돼 대응이 미흡할 경우 수익성이 약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을 전략적 요충지로 삼고 있는 자동차, 가전 등 주요 전방 산업들의 수출 난항도 예상됐다. 전방 수요 업체들의 수출 판로를 상당히 제약하면서 전방산업 교역량 감소에 따른 철강 수요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안 실장은 포스코(AA+, 안정적)의 관세 부과에 따른 직접적 부담은 제한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현대제철(AA, 안정적)은 자회사 현대스틸파이프의 대미 API 강관 수출 영향이 상대적으로 높을 것으로 전망했다.
아울러 국내 자동차 산업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고 분석했다. 현대차·기아 총매출의 40% 이상이 북미 시장에서 발생하며, 2020년대 들어 시장 지위 제고에 힘입어 지속 성장 중이다.
성호재 한국신용평가 기업평가본부 실장은 "한국과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을 고려하면 현대차·기아의 미국 판매 차량 중 3분의 2는 관세 위험에 노출돼 있다"면서 "국내 무역수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만큼, 국내 자동차 산업을 넘어 내수경기 전반에 파장이 커질 것"이라고 했다.
관세 영향이 없는 경우에도 현대차·기아의 올해 합산 영업이익률은 약 1.8%포인트(p)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현대차그룹은 총 210억 달러를 들여 미국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메타플랜트 공장의 생산 대수를 기존 30만 대에서 50만 대로 확대할 계획이다.
다만 현대차·기아의 신용도는 크게 악화하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성 실장은 "완성차 업체엔 감기가 부품사엔 독감"이라며 "전방산업 협상력이 열위한 부품사의 경우 관세 부담 흡수 여력이 부족해 직간접적으로 수익성에 부정적 영향이 더욱 클 것"으로 전망했다.
이차전지 산업의 경우 미국 현지 생산 기반이 잘 구축돼 있어 관세의 직접적인 영향을 크게 받지 않으리라고 평가했다. 다만 소재 업체의 생산기반 부족으로 배터리셀 업체의 경우 간접 영향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했다.
최대 위협은 미국 전기차 시장 수요의 위축을 꼽았다. 전방산업인 전기차 시장의 수요 둔화가 지속하고, 친환경 정책 재검토가 시행되면 이미 기초체력이 약해진 국내 이차전지 업체들의 실적이 악화할 것으로 우려되기 때문이다.
국내 이차전지 업체들은 과중한 설비투자로 재무부담이 커지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의 상각전영업이익(EBITDA) 대비 순차입금 비율은 2022년 0.7배에서 지난해 5.1배로, 포스코퓨처엠은 같은 기간 4.4배에서 15배로 뛰었다.
성 실장은 "국내 배터리셀 업체들의 첨단제조 세액공제(AMPC)에 대한 실적 의존도가 높아,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포함된 각종 인센티브 재검토 시 실적 회복이 장기화해 신용등급 하향 압력이 거세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