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대표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조석래 회장이 건강 상의 이유로 회장직을 고사한 지 반년이 넘었지만, 차기 회장 인선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단순히 조직의 수장이 부재 중이라는 점 외에도 정부와 재계를 잇는 대화의 공식창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돼고 있다.
특히 지난해 11월 신흥국에서 최초로 열린 G20 서울 비즈니스 서밋에서도 무역협회의 사공일 회장과 오영호 부회장이 조직위원회 대표로 역할을 수행, 전경련의 위상이 실추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재계 일각에서는 올해로 창립 반세기를 맞은 전경련의 역할에 대한 재정립은 물론 차제에 조직의 존립 여부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 회장 공석 장기화에 따른 리더십 결여
전경련의 존재 여부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난해 7월 조석래 회장이 건강 상의 이유로 사퇴의사를 밝힌 이후 반년 이상 차기 회장 인선에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전경련과 회장단은 조 회장 후임으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추대를 강력하게 원하고 있지만 이 회장은 “물리적으로 전경련 회장 직을 맡을 수 없다”며 고사하고 있다.
일각에서 전경련이 지나치게 이건희 회장에 집착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일자 전경련과 회장단에서는 “조 회장 임기가 남아있고 회장단에서 조 회장 투병 중에 차기 회장을 인선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며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재계 고위 관계자는 “회장단의 이같은 입장은 사실상 전경련 회장직 수락이 부담스럽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며 “자칫하면 정부와 재계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지난 1999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사퇴한 이후 전경련 회장 선임은 매번 난항을 겪었다. 특히 회장의 사실상 공석 사태가 6개월이 넘게 지속되는 것은 전경련 창립 이래 처음이다.
김우중 회장이 대우그룹 해체와 함께 전경련 회장직을 사퇴한 뒤 4개월 후 김각중 경방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맡은 사례와 28대 회장이었던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과 29대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사이의 공백은 4개월이었다.
이처럼 조직의 수장이 장기간 공석이 되면서 대표단체로서의 위상이 떨어졌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간의 간담회에서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재계를 대표해 발언을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전에는 조석래 회장이 재계 대표로서 각종 행사에 나섰다.
정병철 상근 부회장이 실질적으로 전경련을 이끌고 있지만 전경련 내부 챙기기에도 벅차 대외적인 재계 대표단체로서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대한상공회의소, 경영자총협회 등 재계를 대변하는 이익단체들의 조직 통합이 필요한 게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 변화·혁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재계에서는 전경련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경련을 구성하고 있는 국내 주요 그룹들은 글로벌 경영환경 변화에 맞게 변화와 혁신을 가속화하고 있는데 반해 협회라는 이유 만으로 변화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
전경련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전경련의 혁신과 개선을 요구했지만 ‘복지부동’하는 전경련의 모습에 실망을 느껴 부회장 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전경련 부회장은 2년 임기로 대부분 자동 연임되지만 임기 중에 부회장 직을 사퇴한 것은 김 회장이 처음이었다.
전경련 내부사정에 밝은 한 재계 관계자는 “당시 김준기 회장이 전경련의 혁신에 대해 많은 제안을 했지만 변화가 없어서 많은 실망을 했던 것으로 안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말부터 계속되고 있는 사정당국의 재계 사정에 대해 재계 대표단체인 전경련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재계의 불만을 키우고 있다.
특히 검찰이 지난 9월부터 한화그룹의 비자금 조성 혐의로 수사에 착수한 이후 4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데다 특별한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김승연 회장을 두차례나 소환조사 당했다.
이러다 보니 한화그룹은 해가 바뀐지 열흘 이상 지났지만, 아직도 사업계획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인사도 미뤄지고 있다. 사실상 그룹의 경영이 공백 상태가 된 셈이다.
그런 데도 재계를 대표한다는 전경련은 꿀먹은 벙어리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에 전경련의 설립 목적 중 하나인 ‘경제정책 및 제도개선에 대해 민간경제계의 의견 개진과 구현’이라는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전경련의 역할이 미진하고 ‘잘해야 본전’이라는 평가를 듣다보니 어느 누구도 쉽게 회장 직을 수락하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경련을 이끌고 있는 정병철 상근 부회장이 지난해 7월 제주포럼에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에 대해 정부에 불만을 표시했다가 정부의 압력을 받자 슬그머니 후퇴한 것도 문제다.
전경련으로서는 ‘납품가 연동제’ 등 시장원칙에 반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굽힘없이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게 재계의 생각이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전경련 회장은 재계를 대표하는 외교적 역할을, 상근 부회장을 포함한 사무국은 내부 혁신을 통해 전경련 설립취지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등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