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적인 프로그래머 윌 캐스터는 고농도 방사능이 묻은 총알을 맞고 끝내 숨진다. 그의 아내이자 역시 천재적인 프로그래머인 애블린은 남편의 생각과 사고를 전기 신호로 분석, 치환해 컴퓨터에 옮겨 담는 데 성공한다. 스스로 진화를 거듭하던 이 컴퓨터는 3D프린터를 이용해 마침내 윌의 살아생전의 육체를 그대로 복원하기에 이른다.
조니 뎁이 주연해 화제가 된 영화 ‘트랜센던스’의 한 장면이다. 마치 신이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들어내는 듯한 모습이다. 3D프린터가 의학 분야에 도입되면서 인간의 장기까지 찍어내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학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하지만, 3D프린팅이 ‘신의영역’에 도전할 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의료분야 곳곳을 파고 드는 3D프린팅 = 미래 과학 저널리스트 스티븐 코틀러는 ‘헬스케어 혁명을 가져올 5가지 의료기술’로 3D프린팅을 최우선으로 꼽은 바 있다. 그가 포브스에 기고한 기사에 따르면 이미 전 세계 보청기의 95%가 3D프린터로 제작되고, 하루에 65만쌍의 치아 교정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의수·의족 등 각종 보철 분야에서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3D프린터로 제작한 인공 손을 만들어 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한 성형외과 의사가 3D프린터를 성형수술에 도입해 의학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에이치 성형외과 백정환 원장은 3D프린터로 보형물을 직접 제작해 잘못 깎여나간 턱뼈, 광대뼈 등에 접합시켜 원래의 형태로 되돌려놓는 수술을 시행하고 있다. 3D프린터가 인식하는 정밀도는 컴퓨터 단층촬영(CT)에 비해 20~100배나 높아 아주 미세한 뼈의 굴곡까지도 딱 맞는 보형물을 제작할 수 있다. 3D프린팅을 성형외과 수술에 도입해 상용화한 것은 국내 최초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아이디어다.
네덜란드 의료진은 올 3월 3D프린터로 두개골을 만들어 만성적인 뼈 장애를 앓고 있는 22세의 여성에게 이식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서울성모병원 의료진과 포스텍 연구진은 3D프린팅 기술로 기도 지지대를 개발해 안면기형 환자인 몽골 소년 네르구이 바람사이(6)에게 이식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3D프린팅 신의영역에 도전한다 = 3D프린팅의 가능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최근에는 3D프린팅의 재료로 줄기세포나 생체조직을 이용하는 기술도 개발됐다. 이른바 ‘바이오 프린팅’이라 불리는 이 기술은 생체 재료를 잉크처럼 사용해 신체의 일부를 출력할 수 있다.
바이오 프린팅의 작동원리는 종이에 잉크를 뿌려 글씨를 입히듯 살아있는 세포를 포함한 젤(gel)을 분사하는 방식이다. 이를 단층이 아니라 한층 한층 연결되게 쌓아 올리면 입체적인 조직이 완성된다. 세포는 이 형태대로 증식해 실질적인 인체기관의 역할을 할 수 있다.
현재 루이빌대학교 연구팀은 3D프린터를 이용해 심장에 필요한 관상동맥과 작은 혈관의 일부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10년 내에 세포를 사용해 3D프린터로 이식용 인공심장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 10일 AP통신은 미국의 한 연구진이 세포를 이용한 3D프린터로 인간의 심장판막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이같은 기술이 상용화할 경우 장기이식을 위해 수년을 기다려야 하는 불편은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이렇게 만들어진 장기는 자신의 세포로 만든 것이라 거부반응이 적어 평생 면역 억제제 등 약물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물론 바이오 프린팅이 상용화되기까지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 일단 프린트된 조직을 계속 살아있게 하는 방법이 없다. 또 심장기능 같은 복잡한 장기에 산소를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술도 필요하다.
3D프린터를 이용해 인간의 신장을 만들고자 연구 중인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의 앤서니 애탈라 박사는 “세포에 산소를 공급할 수 있는 기술 등 세포를 살아있게 하는 기술들이 개발된다면 3D프린팅은 의학계에 혁명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약 개발에도 필수품 = 3D프린팅은 신약을 개발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신약 후보들이 임상시험 단계에서 탈락하는 가장 흔한 이유 중 하나가 간에 미치는 독성을 증명하지 못해서다. 현재까지는 이 독성을 입증하기 위해 사람이 직접 약을 먹어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이오 프린팅을 이용해 인간의 간에 해당하는 작은 조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신약의 독성에 대해 훨씬 더 풍부하고 신뢰 높은 자료를 빠르게 얻어낼 수 있다. 미국의 바이오 프린팅 벤처기업인 오가노보는 “3D프린터로 만든 간조직을 신약 등 의약품 개발에 쓰이는 생물학 시료 제품으로 시장에 내놓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