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최근 수요부진과 인플레이션 하락의 영향으로 일본식 ‘잃어버린 10년’과 같은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진단이 나왔다. 이에 시장에서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통화당국이 물가안정목표를 준수해 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디플레이션 발생을 막기 위해 한국은행에 추가로 금리인하를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이재준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25일 내놓은 ‘일본의 1990년대 통화정책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우리 경제는 수요부진과 저(低)인플레이션 상황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디플레이션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24개월째 1%대 저물가가 계속되며 한국은행의 물가안정목표 범위(2.5∼3.5%)를 크게 밑돌고 있다. 전체 물가 수준을 보여주는 GDP 디플레이터 상승률은 최근 0%에 근접할 정도로 하락했다.
이 연구위원은 이같은 우리나라의 거시경제 여건이 일본의 1990년대와 닮아있다고 봤다. 1990년대 일본경제가 겪은 장기침체와 디플레이션은 기본적으로 수요부진에서 촉발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 일본에서 인플레이션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경제성장률이 낮아졌다는 것은 총수요 부족이 경기침체의 주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또 일본의 디플레이션 현상은 소비자가격만을 측정하는 소비자물가지수(CPI) 기준으로 1998년 이후 발생했지만, 경제 전체의 생산물가격을 측정하는 지표인 GDP 디플레이터 기준으로는 1993~1994년경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2011년 이후 GDP 디플레이터 상승률이 CPI 상승률을 상당 폭 밑돌면서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여 올해는 0~1% 수준을 보이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GDP 디플레이터 변동이 CPI 변동에 선행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최근 GDP 디플레이터 증가율이 크게 낮아지고 있는 것은 앞으로 CPI 상승률이 둔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이에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일본과 같은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진단이다.
보고서는 1990년대 일본과 최근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에 대한 정책당국의 인식에서도 비슷한 문제점이 발견된다고 우려했다. 1990년대 초반 일본은행과 기타 전망기관들은 경제전망치를 지나치게 높게 잡아 소극적으로 대응한 나머지 경기침체 장기화와 디플레이션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통화당국인 일본은행은 통화정책의 핵심목표에 대한 인식이 분명치 않아 물가안정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운용체계를 마련하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성장률 전망은 2013년 이후 실제치에 접근하면서 전망오차가 줄어들었으나 인플레이션에 대한 전망은 최근까지도 상당한 예측오차가 발생해 선제적으로 통화정책을 펴나가는 데 장애요인이 될 수 있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1990년대 일본이 경기침체에 대응해 명목금리를 내렸음에도 인플레이션 하락으로 실질금리가 오른 탓에 금리인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우리 경제에서도 저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서 기준금리 하향 조정 효과가 상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향후 인플레이션 예상치도 1% 중반대인 것으로 나타나 시장참가자들의 인플레이션 기대가 점차 낮아지고 있는데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시장참가자들의 인플레이션 기대가 하향 고착화되지 않도록 통화당국이 물가안정목표 준수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대응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인플레이션 기대가 떨어질 경우 명목금리 인하의 경기부양 효과가 희석될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단 디플레이션이 고착화될 경우 금융부채나 재정 등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다 정책대응 수단도 제한되므로 신속한 통화완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