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발표된 손로원(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봄날은 간다’는 우리 가요의 최고봉이다. 백설희에서 시작해 내로라하는 가수들 모두 이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봄날이 각각이듯 목소리도 저마다 색이 다르다.
‘봄날은 간다’는 시인들이 가사가 가장 좋은 노래로 뽑은 바 있다(2004년 계간 ‘시인세계’의 100명 설문조사). 손로원은 6·25 때 피란살이하던 부산 용두산 판잣집에 어머니 사진을 걸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판자촌 화재로 사진은 불타 버리고, 연분홍 치마 흰 저고리의 수줍게 웃던 어머니는 이제 노랫말 속에 남았다. 손로원은 ‘비 내리는 호남선’의 가사도 쓴 사람이다.
‘연분홍 치마…’로 시작되는 노래는 3절로 끝난다. 그런데 올해 칠순과 등단 30년을 맞은 문인수 시인이 봄의 한복판인 4월에 신작 시집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를 내면서 4절 노랫말을 발표했다. ‘밤 깊은 시간엔 창을 열고 하염없더라/오늘도 저 혼자 기운 달아/기러기 앞서가는 만리 꿈길에/너를 만나 기뻐 웃고/너를 잃고 슬피 울던/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이로써 ‘봄날은 간다’는 어머니, 여성을 위한 노래에서 시인 자신을 포함한 노인들의 노래로 의미가 더 커졌다.
‘봄날은 간다’는 박시춘(1913~1996)이라는 뛰어난 작곡가 덕분에 불후의 명곡이 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3000여 곡의 노래와 악상은 근대 한국 대중가요의 초석이자 근간”(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이다. ‘애수의 소야곡’ ‘신라의 달밤’ ‘가거라 삼팔선’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전우야 잘 자라’ ‘이별의 부산정거장’ ‘비 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돌지 않는 풍차’….
그가 없었으면 한국인들은 무슨 노래를 부르고 살았을까. “그를 만나면 늘 술이요, 노래 만들기로 신명이 났다”고 했던 반야월(1917~2012)과 함께 박시춘은 우리 가요의 뼈와 혼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가 타계한 뒤 추모·현창사업 논의가 무성했다. 탄생 100년이 되는 해까지 묘소가 있는 남양주에 기념관을 만들겠다는 구체적 계획도 발표됐다. 하지만 진전이 없었고, 탄생 100년을 맞은 2013년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100주년 기념특별전이 열리고 ‘박시춘 노래비’가 제막됐다. 해마다 남이섬에서는 ‘봄날은 간다’ 노래축제가 열리고 있지만, 기념관 사업은 진척이 없다. 생가가 복원된 고향 밀양에서 2002년에 시작된 박시춘가요제는 2년 만에 ‘밀양아리랑가요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모든 차질과 변경은 친일행적을 둘러싼 논란과 반대 때문이다. 그가 일제 당시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아내’ ‘목단강 편지’와 같은 친일 가요를 작곡한 점을 들어 기념사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크다. 진주의 ‘남인수가요제’도 친일 시비 때문에 12년 만에 ‘진주가요제’로 변경됐다. ‘낙화유수’ 등의 월북 작사가 조명암의 이름을 딴 ‘조명암가요제’는 ‘아산가요제’로 바뀌었다.
박시춘의 친일활동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박시춘이 작곡한 군국주의 성향 가요가 그가 작곡한 작품 전체를 함축할 정도로 분량과 품질의 측면에서 과연 문제적인가?” 이미 6년 전 가요작가협회 주최 세미나에서 평론가 이동순 교수(영남대)가 한 말이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반야월은 타계 2년 전 ‘마지못해 해야 했던 친일행각’에 후회와 유감을 표하면서 용서를 구한 바 있다. 박시춘이 살아 있다면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최근 전쟁가요기념관을 만들어 박시춘의 ‘전우야 잘 자라’ 등 진중가요를 담으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나 보다. 그러니까 친일 시비를 피해 애국가요만 기리자는 것인데, 아주 미흡하고 부족한 일이다. 박시춘의 전곡을 담아야 한다. 친일 가요도 빠뜨릴 이유가 없다고 본다.
오늘이 박시춘의 기일이고 내년은 타계 20년이어서 박시춘과 ‘봄날은 간다’ 이야기를 했다. 그의 이름 시춘(是春)은 지금이 봄, 늘봄이라는 뜻이다. ‘봄날은 간다’의 가사가 4절로 끝나라는 법이 있나. 5절, 6절…10절이 있어도 좋은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