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2월 13일 함북 종성에서 태어난 김규동(金奎東)은 1948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중퇴하고 스승인 시인 김기림(金起林)을 찾아 혼자 월남했다. 3년간을 기약했던 서울살이는 2011년 9월 28일 숨질 때까지 60여 년 계속됐고, 그는 시인이 됐지만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었다.
타계 6개월 전 건강이 나빠져 거의 구술로 빚어낸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는 존재 이유였고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시인을 자처했으나 영혼을 뒤흔든 아름다운 시 한 편 출산하지 못했음은 순전히 김 아무개의 책임입니다.” 그는 13년 만에 ‘느릅나무에게’(2005년)라는 시집을 낼 때, 이미 발표한 400편 중 83편만 합격시키고 나머지는 버린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나는 시인이다’에서 쉬운 시를 찬탄했다. 대표적으로 꼽은 시인이 천상병. “나는 부산에 가고 싶다. 추석을 맞아서 누님한테 가고 싶은데 부산 갈 기차표 살 돈이 없다. 그래서 못 간다. 누님은 나를 많이 기다릴 텐데.” 이렇게 말하고 싶은 대로 썼는데도 독자들의 반응이 대단한 것은 시에 진심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천상병과 달리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은 어려운 시를 지향했는데, 김규동은 둘 다 좋다고 했다. 삶이 깨끗하면 작품에도 거짓이 없다는 것, 쉬운 시는 진실한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살아 있는 시란 펄펄 끓는 감정이 담긴 시라는 것이다. 시인이 먼저 자기 시에 울어야 읽는 사람도 따라 울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민주화에도 기여한 그는 모든 부문의 통일을 염원했던 사람이다. ‘꿈에 네가 왔더라/(중략)/너는 울기만 하더라/내 무릎에 머리를 묻고/한마디 말도 없이/목놓아 울기만 하더라/(하략)’. 그가 어머니가 되어 쓴 ‘북에서 온 어머님 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