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목숨을 걸고 사는 여성들

입력 2016-05-24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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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키가 크다. 건장한 남자다. 마스크를 한 얼굴에는 안경을 썼다. 안경 속에서 눈을 깜빡인다. 내가 뭘 어쨌다고? 왜들 이러지? 이 많은 경찰관과 기자들 대체 다 뭐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강남역 인근 주점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20대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그놈은 죄의식도 없고 범죄의식도 없었다. 24일 아침 경찰서를 나설 때 유족들에게 한마디 하라는 말에도 전혀 반응을 하지 않다가 형사들에 이끌려 현장검증에 나가서야 “개인적 원한이나 감정은 없었다”고 뻔뻔하게 겨우 대답하고, 평소에 하던 일을 하듯 범행을 재연했다.

그놈은 왜 이 세상을 살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건 자신이 선택한 일이 아니지만 주어진 목숨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사람 아닌가? 그런데 그놈은 끈질기게 기다렸다가 여성을 살해했다. 1시간 넘게 범의(犯意)를 유지한 채 범행 대상을 기다린 그 노력과 정신으로 세상에 의미가 있고 자신에게도 가치가 있는 일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번 사건은 여성 혐오가 일상의 성차별 차원을 넘어 극악한 여성 살해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실연이나 금전 거래관계, 원한과 같은 특정한 동기가 아니라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는 게 범행 동기라니 공포와 충격의 파장이 더 크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특히 젊은 여성에 대한 비하와 무시, 남자보다 사회적으로 더 우대를 받는 여성들의 약진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심지어 여성가족부에 대한 공격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터진 이번 사건으로 우리 사회는 페미사이드(Femicide)의 충격에 휩싸였다. 페미사이드는 Female(여성)과 homicide(살해)가 결합된 단어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의 2013년 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전 세계 202개 국 가운데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살해되는 7개국 중 하나다. 살인사건은 가해자가 대부분 남성이고 피해자도 남성이 더 많다. 193개 국의 남성 피해자 비율이 평균 78.7%였다. 그러나 한국은 통가, 일본, 아이슬랜드, 뉴질랜드, 라트비아, 홍콩과 함께 여성 피해자의 비율이 더 높았다.

통계청 추계에 따르면 2015년 현재 결혼 적령기의 남성은 여성보다 45만여 명이 더 많다. 성비가 120 대 100으로 불균형 상태다. 말하자면 20% 가까운 남성이 배우자를 찾지 못하는 구조다. 가부장제적 사회문화까지 더해져 여성들의 결혼 기피가 더 심각해지면 여성 혐오는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

성적 불평등 정도가 높을수록 여성 살해가 증가한다고 한다. 여성 지위의 향상으로 위협을 느낀 남성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는 분석도 있다. 우리 사회는 단지 남성 대 여성만의 대립구조가 아니라 모든 부문에서 대립과 갈등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무슨 일이, 어떤 범죄가 더 벌어질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세월호 사고가 한 가지 요인으로 벌어진 건 아니다. 이번 사건도 한 가지 요인으로 인해 빚어진 게 아니다. 업소에서 남녀가 화장실을 함께 쓰는 것은 당연히 고쳐야 할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배려, 여성에 대한 존중이다. 어떻게 해야 그런 것들이 회복되도록 할 수 있을까?

이번 사건을 저지른 그놈은 조현병(調絃病) 환자라고 한다. 조현은 현악기가 제 소리를 내도록 음률을 고르는 일이다. 사회 전체가 제 소리를 내서 함께 어울리는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하다. 고개를 들어 옆 사람, 앞 사람을 보며 살아야 한다. 남자 입장에서 젊은 여성은 다 나의 아내이며 누나 또는 누이동생이다. 일상의 위협과 위험 속에서 목숨을 걸고 사는 여성들이 가엾지도 않은가. 아무 죄도 없이 희생된 그 여성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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