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본명 고성애)는 1948년 전남 해남에서 8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70년 광주의 ‘새전남’과 ‘주간 전남’에서 사회부 기자로 근무했고,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 ‘부활과 그 이후’로 문단에 데뷔했다. 1979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을 졸업했다. 그 뒤 ‘목요시’ 동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고, 시집으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이 시대의 아벨’(1983), ‘여성해방출사표’(1990), ‘광주의 눈물비’(1990) 등을 출간했다.
고정희가 여성주의 문인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사회 변혁과 민주화를 지향하면서도 여성문제를 독자적인 문제 틀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시가 ‘여성해방출사표’이다. 여기에서 “남자가 모여서 지배를 낳고/지배가 모여서 전쟁을 낳고/전쟁이 모여서 억압세상을 낳았기 때문에//국토분단 장벽보다 먼저/민족분단 장벽보다 먼저/남녀분단 장벽 허물 일이 급선무”라고 당차게 말한다.
고정희는 사회적 타자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에서는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서/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뿌리 깊으면야/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며 ‘상한 영혼’으로 표상되는 사회적 약자에게 따뜻한 위로와 연대의 손길을 건넨다.
여성 관련 단체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과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했고, 여성주의 대안문화 공동체 ‘또 하나의 문화’를 결성해 활동했다. 무크지 ‘또 하나의 문화’ 2호(1986)에 실린 ‘한국 여성문학의 흐름’에서는 “여성문학은 굳이 여성만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 문제를 자기 경험 속에서 아프고 혹독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며 여성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기념비적인 글을 남겼다.
“광주에서는 시대의식을 얻었고, 수유리 한신대에서는 민족과 민중의 내용을 배웠으며, ‘또 하나의 문화’를 만나 민중에 대한 페미니즘의 구체성을 얻었다”는 고정희. ‘여성주의 문학의 선구자’, ‘민족통일과 민중해방을 꿈꾼 시인’ 고정희는 1991년 지리산 등반 도중 불어난 계곡물을 피하지 못하고 실족사했다.
영결식에서 지인들은 “한편에서는 여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머슴아’들에 치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기집아’들에 치이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누구보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던 그대”를 부르며 고인을 추모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시처럼, 고정희는 자신의 시보다 더 큰 여백을 남기고 사라졌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