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주책과 엉터리가 변한 까닭

입력 2017-06-2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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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기자가 그렇듯 나 역시 출근하면 가장 먼저 신문을 읽는다. 보수지, 진보지, 경제지 세 종류를 훑어보는데, 안 읽는 척하면서 꼼꼼히 보는 것이 ‘오늘의 운세’이다. “귀인을 만날 수(數)”라는 내용이 나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신문마다 ‘오늘의 운세’가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미래를 미리 알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 싶다.

며칠 전 운세는 “근묵자흑(近墨者黑).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지는 것처럼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면 물드니 멀리하세요”였다. ‘내가 파란 사람인지, 빨간 사람인지, 심지어 검은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맑고 깨끗한 사람하고만 교류할 수 있겠나’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그러면서 슬슬 직업병(?)이 발동해 ‘근묵자흑화(化)’한 말을 떠올렸다.

‘언어의 근묵자흑!’ 긍정적인 의미의 말이 부정어 ‘없다’와 자주 어울린 결과 부정의 의미로 바뀐 사례는 의외로 많다. 대표적인 게 ‘주책’이다.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주책바가지야!”라는 대사는 쉽게 들을 수 있다. 주책에 속되거나 놀림조에 쓰이는 접사 ‘-바가지’가 더해진 형태로, 실수를 반복하고, 실속 없이 남들이 하자는 대로 행동하는 등 실없이 구는 사람을 놀리는 말이다.

‘주책’은 한자어 ‘주착(主着)’에서 유래했다. 일정하게 자리 잡힌 주장이나 판단력을 뜻하는 아주 좋은 말이다. 국립국어원은 “모음의 발음 변화를 인정하여, 발음이 바뀌어 굳어진 형태를 표준어로 정한다”는 규정에 따라 ‘주착’을 버리고 ‘주책’만 쓰게 했다. ‘초생달’이 ‘초승달’로 바뀐 것처럼 발음하기 편한 말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주책은 주로 ‘없다’와 어울리면서 일정한 주장이나 판단력이 없이 아무렇게나 함부로 하는 짓이라는 부정의 뜻이 되었다. 하나의 단어에 상반된 두 의미가 자리 잡은 것이다.

따라서 줏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여 몹시 실없다는 뜻의 표준어는 ‘주책없다’ ‘주책이다’ ‘주책맞다’ ‘주책스럽다’ 모두 해당한다. 같은 뜻의 ‘주책 떨다’, ‘주책 부리다’는 한 단어가 아니므로 띄어 써야 한다. 이 중 ‘주책이다’는 올해 1월에야 표준어 규범 안으로 들어왔다. 언중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 덕이다. 다만 체언 ‘주책’에 ‘이다’가 붙은 말이라 사전의 표제어에서는 제외됐다.

‘엉터리’ 역시 부정어 ‘없다’와 어울린 결과 뜻이 바뀐 재미있는 말이다. 원래 ‘사물이나 일의 대강의 윤곽, 사물의 근거, 터무니’ 등 좋은 의미의 순우리말로, 진실된 모습을 표현할 때 쓰였다. 반대로 말이나 행동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을 때, 실속이 없거나 실제와 어긋날 때는 ‘엉터리없다’라고 한다. ‘엉터리없는 짓’ ‘엉터리없는 생각’ ‘엉터리없는 이야기’….

그러나 실제로는 ‘엉터리다’ ‘엉터리 짓’ ‘엉터리 생각’ ‘엉터리 이야기’처럼 ‘없다’가 생략된 채 쓰이고 있다. ‘없다’의 의미가 ‘엉터리’ 속에 들어가 ‘엉터리’만으로도 ‘엉터리없다’의 뜻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엉터리’와 ‘엉터리없다’는 같은 뜻의 단어로 표준국어대사전에 함께 올랐다. 게다가 엉터리는 터무니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까지 뜻이 넓어졌다.

마음씨가 곱고 따뜻하며 행동이 올바른 이를 가까이하면 즐겁다. 그런데 그런 이와 어울리려면 먼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엉터리없는 사람을 알아보는 노력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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