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정(1876~1935)은 한말의 정치 운동가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이준(李儁)의 부인이자 정치적 동지이다.
1876년 태어난 그녀의 집안은 명확지 않다. 1906년 한성부 호적에는 우봉(牛峰) 이씨로, 1981년 발행된 이준의 전주 이씨 족보에는 평동(平東) 이씨로 되어 있다. 17세에 형조판서 김병시(金炳始)의 주선으로 당시 35세인 이준과 혼인한 그녀는 후처이다. 함경북도 북청에서 지역 토호의 딸 신안 주씨와 12세에 결혼한 이준이 전처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고 그녀와 결혼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들이 동지적 부부관계였다는 것이다. 사위 유자후(柳子厚)가 쓴 이준의 전기 ‘이준선생전(李儁先生傳)’에는 “총명 다기한 이일정 여사는 실로 동지와 같은 감”이 있어, “군국사(君國事)와 사회운동 등에 있어 의론하며 공동 활동함을 약속했다”고 쓰여 있다. 이준은 그녀를 “나의 세군(細君)이며 동지로서 부인계의 혁명 도령”이라 칭했다 한다.
그렇듯 그녀는 정치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공진회 회장 이준과 그 간부들이 체포되자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소식을 접하고는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학비 조달을 받지 못해 곤경에 처한 일본 유학생들이 ‘단지동맹’으로 공부를 결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들 21명에게 격려 편지와 함께 21원이라는 큰돈을 송금하기도 했다. ‘제국신문’ 폐간 소식에는 “이천만의 귀와 눈이 없어지는 것”이라며 “눈앞이 캄캄”하고 “심신이 흩어진다”는 개탄의 글을 기고하였다. 이를 두고 ‘황성신문’은 그녀를 문명부인(文明婦人)으로 칭하며, 그녀만 같으면 한국의 “민지개발(民智開發)이 날로 증진할 것”이라고 극찬하였다.
나아가 이일정은 한국에서 부인상점을 처음 연 것으로도 유명했다. 여성도 독자적인 생활 기반을 닦아야만 한다는 평소의 지론대로, 1907년 2월 안국동에 간판을 내걸고 살림살이에 필요한 일용 잡화를 판매하였다. 1928년 ‘별건곤’ 12월호는 부인상점의 원조로 그녀와 그녀의 ‘일정상회(一貞商會)’를 소개하였다. 이 잡화점은 불과 2년 만에 문을 닫았는데, 그녀가 헤이그에서 사망한 남편의 유해라도 찾겠다고 해외를 떠돈 것이 폐점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식민지 이후 그녀의 행적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다만 1920년 4월 3일자 ‘동아일보’에서 그녀의 이름이 발견된다. 이 담화에서 그녀는 남녀의 인격적 평등에 기반한 현모양처, 그것은 천역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부인의 사명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 후 이일정이란 세 글자가 다시 신문지상에 나타난 것은 1935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이다. 5월 13일 딸 종숙의 집에서 숙환인 심장병으로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