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때문이었습니다.” 이승에서 인생을 낭비한 죄를 묻는 저승세계 나태지옥의 초강대왕 앞에서 주인공은 고백한다. 영화 ‘신과함께 - 죄와 벌’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김자홍은 소방관 일 외에도 밤이면 대리운전을 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나르며 열심히 살았다는 칭찬에(법적으로 그런 겸직이 가능한지는 의문이지만), 나직이 내뱉는다.
“난 어떻게 환생할지 정했어. 코스피 100위권 안쪽 재벌 2세로. 한국은 그거 아니면 저승보다 더 지옥이거든.” 김자홍을 저승세계로 안내하는 쾌활한 저승사자 해원맥이 한 말이다. 영화의 주제와 상관없이 머릿속에 남는 대사들이었다.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불안한 삶, 금수저만 대접받는 헬조선이 ‘1000만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구나 싶었다.
‘내 가족, 혹은 내 (경제적인) 안전만을 추구할 뿐’이라는 요즘의 암묵적인 구호는 이미 물릴 만한 수준이다. 개인성의 발현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지만, 이건 개성을 발휘하는 개인성이 아니라 병든 개인성이다. 조직과 공동체에 기여하는 미덕은 ‘바보 같은 놈’으로 취급받기 일쑤이다. 왜 그럴까. 대한민국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 아픔의 중심부에는 20년 전 대한민국을 강타한 IMF 외환위기가 있다. 정신적 외상, 즉 IMF 트라우마는 우리 사회를 집어삼키고 지배하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20년, 해가 바뀌어 이제 21년이다. 그간 경제는 많이 나아졌다고들 한다. 경상수지나 외환보유액, 국민 총생산액, 수출증가율, 국가신용등급까지 지표로 보는 경제는 모두 성장했다. 아니 나아진 정도가 아니라 ‘사상 최고’, ‘역대 최고’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외환보유액은 작년 말 4000억 달러에 육박하며 ‘역대 최고’, 경상수지는 69개월째 흑자, 수출은 작년 10월 말 기준 ‘사상 최대치’다. 1인당 국민소득도 3만 달러를 넘보고 있다. IMF 역사상 4년이라는 최단 기간에 대출프로그램을 갚아내 ‘IMF 조기 졸업’이라는 눈부신 타이틀을 가진 대한민국답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천천히, 광범위하게 잠식해갔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그저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파산이나 실직을 겪은 이들.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한 채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사람들. 더욱 안타까운 건 좌절한 기성세대를 바라보며 이를 고스란히 전이받는 신세대다. 언제 직장에서 잘릴지 모르니 ‘안전빵’ 공무원만을 바라보는 ‘공시족’들, “10억 원을 준다면 1년 감방에 가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청소년들이 이들 신세대의 자화상이다.
‘난 뭔가 잘못됐어’라는 자책감, ‘난 위험해’라는 안전에 대한 부정적 생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좌절된 의지가 트라우마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이런 트라우마가 만연한 사회 속 구성원들에게 안전하고 믿을 만한 사회, 올바른 질서와 의미가 존재하는 사회란 없다. 물론 IMF 외환위기 이후 시스템이 만들어낸 ‘트라우마 가중 요인’들의 영향도 크다. 돈을 쌓아두기에 급급한 기업들의 고용 정체로 인한 실업률 증가를 비롯해 소득 양극화나 노동시장 왜곡이 그렇다.
그렇다면 도대체 20년간 그 후유증을 달래기 위한 제대로 된 치료 시스템은 뭐가 있었나.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됐는데, 왜 정신적인 허기는 계속되는지 제대로 된 고민이 이뤄진 적이나 있을까.
‘신과함께’에서 김자홍은 오로지 가족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다 죽고 환생의 구원을 얻게 된다. 신분 상승 클리셰인 ‘판사’를 꿈꾸던 김자홍의 동생 역시 죽음을 맞지만 선하게, 열심히 살아온 데 대한 보상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암시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이는 해피엔딩인가. 아득바득 살지만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삶이 어차피 이승에선 불가능하다는 암시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