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15. 김정은 위원장이 쓴 필기구는

입력 2018-05-0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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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정상회담에 앞서 평화의 집 방명록에 무언가를 진지한 표정으로 적어 넣었다.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이 회담에 집중된 만큼 이때 사용된 펜 역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 관심을 반영하듯 이 펜은 뉴스와 신문에서 다뤄졌지만 대부분의 기사가 몽블랑 만년필이라고 오보를 냈다. 김정은 위원장이 사용한 펜은 몽블랑 제품도, 만년필도 아니었다. 보통 사인펜이라고 부르는 펠트 팁 펜(felt tip pen)이었다. 방명록에 씌어 있는 숫자 ‘7’을 보면 중앙의 갈필(渴筆)은 펠트 팁 펜으로 썼을 때 생기는 획(劃)이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의 어떤 제품일까? 언뜻 낙후된 북한을 생각하면 중국의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오래전인 1980년 충남 서산 앞바다에 침투했다가 격침된 간첩선에서 나온 연필과 만년필, 볼펜에 각각 모란봉, 만경대, 만수대 등 북한 상표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북한산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싶다. 또 비교적 최근인 2011년의 뉴스를 보면 평양 수지연필공장에서 샤프 펜슬, 볼펜, 색연필 등 19종의 펜을 생산한다고 했으니 아마도 김 위원장의 펜은 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필기구였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오보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도 꽤 많이 그 펜을 몽블랑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서명은 만년필로 해야 한다는 생각과, ‘만년필은 몽블랑’이라는 인식이 결합되어 오인(誤認)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모든 회사는 자기네 회사가 쉽게 인식되고 오래 기억되게 하는 노력을 해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상징(象徵)이다.

이번에도 워터맨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된다. 워터맨은 사업을 시작한 1883년 첫해에는 하루에 한 개도 팔지 못했지만, 1900년대 초가 되면 하루에 1000개 넘게 파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만년필 회사로 성장한다. 어떤 회사는 워터맨이라는 같은 이름을 회사명으로 했다가 패소하여 이름을 바꿀 정도였다. 워터맨이라는 이름만 내걸어도 펜이 잘 팔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2대 사장 프랭크 워터맨은 이름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1902년 워터맨 펜은 지구본 모양의 글로브(globe)로고를 만년필에 새기기 시작했다. 지구본 로고만 보고도 사람들이 최고(最高)의 만년필은 워터맨이라는 연상(聯想)을 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1970년대에 생산된 북한의 만경대 만년필.
▲1970년대에 생산된 북한의 만경대 만년필.

1924년 쉐퍼는 최고급 라인 만년필에 좁쌀만 한 하얀 점(White Dot)을 뚜껑에 박기 시작했다. 하얀 점은 평생 보증을 의미했는데 이것은 워터맨의 로고보다 더 크게 성공했다.

1888년 만년필 사업을 시작한 파커는 오래된 회사였지만 워터맨과 쉐퍼에 뒤처져 있었다. 1921년 출시한 컬러 마케팅의 원조(元祖) 빨간색 듀오폴드 만년필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상징은 변변치 않았다. 1933년 새로운 만년필 파커 버큐매틱(Vacumatic)을 공식 출시하였는데 그 유명한 화살클립이 달려 있었다. 이 화살클립은 워터맨의 로고와 쉐퍼의 하얀 점까지 넘어서는 상징이 됐다.

하지만 반세기간, 198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상징이었던 화살클립은 몽블랑의 하얀 별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몽블랑이든 아니든 세상을 바꾸는 것은 펜이 아니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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