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관심을 반영하듯 이 펜은 뉴스와 신문에서 다뤄졌지만 대부분의 기사가 몽블랑 만년필이라고 오보를 냈다. 김정은 위원장이 사용한 펜은 몽블랑 제품도, 만년필도 아니었다. 보통 사인펜이라고 부르는 펠트 팁 펜(felt tip pen)이었다. 방명록에 씌어 있는 숫자 ‘7’을 보면 중앙의 갈필(渴筆)은 펠트 팁 펜으로 썼을 때 생기는 획(劃)이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의 어떤 제품일까? 언뜻 낙후된 북한을 생각하면 중국의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오래전인 1980년 충남 서산 앞바다에 침투했다가 격침된 간첩선에서 나온 연필과 만년필, 볼펜에 각각 모란봉, 만경대, 만수대 등 북한 상표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북한산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싶다. 또 비교적 최근인 2011년의 뉴스를 보면 평양 수지연필공장에서 샤프 펜슬, 볼펜, 색연필 등 19종의 펜을 생산한다고 했으니 아마도 김 위원장의 펜은 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필기구였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오보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도 꽤 많이 그 펜을 몽블랑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서명은 만년필로 해야 한다는 생각과, ‘만년필은 몽블랑’이라는 인식이 결합되어 오인(誤認)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모든 회사는 자기네 회사가 쉽게 인식되고 오래 기억되게 하는 노력을 해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상징(象徵)이다.
이번에도 워터맨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된다. 워터맨은 사업을 시작한 1883년 첫해에는 하루에 한 개도 팔지 못했지만, 1900년대 초가 되면 하루에 1000개 넘게 파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만년필 회사로 성장한다. 어떤 회사는 워터맨이라는 같은 이름을 회사명으로 했다가 패소하여 이름을 바꿀 정도였다. 워터맨이라는 이름만 내걸어도 펜이 잘 팔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2대 사장 프랭크 워터맨은 이름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1902년 워터맨 펜은 지구본 모양의 글로브(globe)로고를 만년필에 새기기 시작했다. 지구본 로고만 보고도 사람들이 최고(最高)의 만년필은 워터맨이라는 연상(聯想)을 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1924년 쉐퍼는 최고급 라인 만년필에 좁쌀만 한 하얀 점(White Dot)을 뚜껑에 박기 시작했다. 하얀 점은 평생 보증을 의미했는데 이것은 워터맨의 로고보다 더 크게 성공했다.
1888년 만년필 사업을 시작한 파커는 오래된 회사였지만 워터맨과 쉐퍼에 뒤처져 있었다. 1921년 출시한 컬러 마케팅의 원조(元祖) 빨간색 듀오폴드 만년필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상징은 변변치 않았다. 1933년 새로운 만년필 파커 버큐매틱(Vacumatic)을 공식 출시하였는데 그 유명한 화살클립이 달려 있었다. 이 화살클립은 워터맨의 로고와 쉐퍼의 하얀 점까지 넘어서는 상징이 됐다.
하지만 반세기간, 198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상징이었던 화살클립은 몽블랑의 하얀 별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몽블랑이든 아니든 세상을 바꾸는 것은 펜이 아니라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