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잔 어때?” 이맘때면 마음 터놓고 오붓하게 한잔하자는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세밑 인생의 기로에 선 지인의 제안이라면 어떻게 뿌리치겠는가. 오랜 고심 끝에 이혼한 친구는 생계를 위해 20여 년 만에 다시 미용실을 열었다. 신년 계획을 세우던 선배는 이달 말 부득불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해외로 판매망을 넓힌 사업가 후배는 일이 영 안 풀려 밤잠을 설치고 있다…. “아쉽고 서글펐던 마음 다 털어내고 내년엔 또 한번 힘껏 달려보자!” 술잔에 응원의 말을, 위로의 말을 담아 마시면 가슴이 벅차다. 연말에 마시는 술이 쓰지만 각별한 이유이다.
그런데 송년 모임이 여러 건 이어지다 보면 누구나 기껍지 않을 게다. 피로가 걷잡을 수 없이 쌓이는 탓이다. 특히 술이 말썽이다. “한 잔만 하자”고 모이지만 한 잔을 마시면 또 한 잔이 생각나 어느 순간 도를 넘어서니 말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모임을 피할 수도 없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모임엔 의미가 있으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송년회 풍경이 예전 같지 않다. 먹고 마시며 왁자한 술판 대신 영화·연극·전시회장 등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회사는 부서별·팀별로, 학교 동문은 동기끼리 단란하게 1박 2일 여행을 가기도 한다. 설사 시내에서 송년회를 하더라도 술이 아닌 식사 정도로 갈무리하는 등 예년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지난주 CBS 의뢰로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 이상(74.4%)이 점심이나 저녁 식사 정도로 간소하게 하는 직장 송년회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 하는 게 좋다’는 응답도 12.5%나 나왔다. 내키지도 않는데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먹고 마시는 ‘음주가무형’ 송년회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는 의미다.
그런데 ‘술 한잔 하자’는 말은 잘 이해해야 한다. 두 잔, 석 잔, 넉 잔…이 아닌 딱 ‘한 잔’만 마시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우리말에서 붙여 쓰는 ‘한잔’은 잔을 세는 의미가 아니라 ‘간단하게 한 차례 마시는 술’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량이 센 사람과 마신다면 한잔이 수십 잔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띄어 쓰는 ‘한 잔’도 잘 살펴야 한다. 한 잔도 한 잔 나름이지 않은가. 요즘 유행하는 다모토리 한 잔은 소주 한 병이 다 들어가니 “헉” 소리가 절로 나온다. 다모토리는 “큰 잔으로 소주를 마시는 일 또는 큰 잔으로 소주를 파는 집”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한번’도 ‘한잔’만큼이나 참 어렵다. 붙여 쓰는 ‘한번’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지만, 띄어 쓰는 ‘한 번’은 없다. ‘한’과 ‘번’이 각각의 단어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두 번, 세 번, 네 번 등처럼 수량을 뜻한다. 반면 붙여 쓰는 한번은 “한번(시도) 먹어 봐”, “인심 한번(강조) 고약하다”, “낚시나 한번(기회) 갑시다” 등과 같이 쓰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연초에 세운 계획과 달리 혼돈 속에 해의 끄트머리를 보내는 이들도 있으리라. 부디 자책하지 말고 마음 편한 사람과 한잔(딱 한 잔도 좋고)하며 묵은 찌꺼기를 날려 버리시길. 인간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이기 일쑤다. jsjy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