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산으로 간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Feat. 울지마 톤즈)

입력 2020-01-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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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기회를 잡으면 세상 똑똑한 척 해볼 욕심에 전날부터 분주했다. ‘이런 질문 예상 못하셨죠?’라며 정신승리를 이룰 요량에 속으로 낄낄 대며 혼자 신났다.

14일은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열린 ‘빅데이’였다. 분주히 손을 들고 눈빛공격을 날렸음에도 끝내 마이크를 넘겨받지 못하고 회견이 끝난 뒤, 날아드는 일폭탄의 파편에 치이고 쫓기며 정신없이 지나갔다. 문재인 대통령의 표정과 목소리는 회견 내내 따뜻하고 차분했다. 내심 불편했을지도 모를 질문에 굳어질 때도 있었지만 문 대통령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문 대통령의 회견에서 평범한 사람을 위한 온기는 드물었다. 맨 앞이어야 마땅한 보통의 삶은 통치와 정치의 몫이었고, 권력투쟁에 우선순위를 내준 가난한 이들의 살림살이는 응달진 곳에 방치됐다. 이날 문 대통령이 수없이 말했던 개혁과 공정, 정의 어디에서도 소시민을 향한 따뜻한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확실한 변화’를 이날 회견의 테마로 내걸었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그토록 확연히 달라지는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부동산은 더 규제하고, 검찰은 더 개혁하고, 북한은 더 기다리겠다고 했을 뿐이다. 가던 길 그대로 가겠다는 뜻일 뿐이다. 질문이 없었으니 답변을 못했던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동쪽을 묻는 질문에 능숙하게 서쪽을 답한 문 대통령의 언변을 감안하면 동의하긴 쉽지 않다.

이날 회견에서 나왔던 이야기의 중심은 온통 문 대통령이었다. 가장 길게 말했던 검찰 문제에 관해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검찰 인사권이 서초동에 가본 적도, 갈 일도 없을 사람들에게 무슨 상관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수십억 강남 아파트 값을 대통령 취임 초기 수준으로 되돌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면죄부를 받으면 ‘지옥고’에서 매서운 겨울을 버티는 사람들에게 없던 집이 생기는지 말하지 않았다. “외교는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목함지뢰에 두 다리를 잃고도 북한의 사과 한마디 못 받은 육군 중사 가족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이 왜 필요한지 납득시키려는 노력은 없었다.

문 대통령은 직업은 선출직 공무원이다. 직책이 대통령이고 업무는 통치라고 보면 사전적 의미는 얼추 맞겠지만, 문 대통령에 대한 기대치는 이보다 좀 더 고차원적이다.

나라가 나를 져버렸다는 좌절감에 빠졌던 많은 이들은 새 대통령을 선택하며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취임 초기 나라가 시끄러웠을 때도 시간이 좀 지나면 여유가 생겨날 줄 믿었다. 그런데 집권 4년차에 접어들도록 무엇이 나아졌는지, 혹은 나아질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지역감정은 진보와 보수로 변태를 일으켜 다시 창궐하고, 남과 여는 젠더권력을 놓고 반목하고, 부모와 자녀는 세대 간극을 좁히지 못해 갈등하는데도 대통령의 관심은 박해 보이기만 한다.

행여라도 문 대통령이 극한의 갈등을 더하기와 빼기의 계산이 작동하는 직업적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았기를 기원한다. 선출직 공무원에게 광장의 인파는 얻을 표와 버릴 표로 분류됐을 것이니, 갈등하고 반목하도록 내버려두는(심지어 부추기는) 것이 남는 장사일 수 있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14일 있었던 기자회견은 실망을 넘어 이런 의심을 키울 만큼 차가웠다.

문 대통령은 올해 키워드로 ‘확실한 변화’를 약속했다. 사실 밑도 끝도 없는 모호한 말이지만 보스의 영이 떨어졌으니 분명 공직사회가 분주히 움직일테다. 하지만 시민들은 아무런 변화도 못느끼는데 대통령의 입맛에만 맞는 변화가 될까 걱정스럽다. 대한, 소한 다 지나도록 내팽개쳐 얼어 죽을 지경인 살림살이에 “긍정적인 지표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던 말처럼 1도 공감 못할 변화는 아니었으면 한다.

차라리 말없는 다수의 누적된 피로감이나 덜어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다.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변화도 좋지만 그 전에 좀 조용히 살아보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정초부터 정떨어지는 이야기를 늘어놓자니 한 해 운수가 사나울 것 같아 따뜻한 이야기로 글을 마친다. 신년 기자회견이 있던 14일은 고 이태석 신부의 10주년 기일이다. 문 대통령도 “내가 이 신부 경남고 선배”라며 자랑했던 이다. 이날 늦은 귀가 후 무심코 켠 TV에서 ‘울지마 톤즈’를 다시 보니 집 나간 줄 알았던 영혼이 아직 내 안에 있음이 느껴져 적잖이 위로가 됐다. 참고로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를 맞아 ‘울지마 톤즈2 : 슈크란 바바’도 개봉 중이라고 한다. 그가 하느님 곁으로 떠나던 순간 남겼다는 말인 “Everything is good”을 많은 사람들이 화면을 통해서나마 듣게 된다면 ‘확실한 변화’가 일어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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