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의 원견명찰(遠見明察)] 부잣집 아들

입력 2020-03-1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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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일렉트릭 사장

내가 어릴 적 살던 마을의 이름은 ‘물앙말’이다. 그 시절에는 의미도 모른 채 비슷한 발음으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최근 전주시의 마을조사사업 동심(洞心) 찾기에 의하면 ‘물앙말’이라는 이름은 마을 가운데에 공동의 우물이 있었고, 그 물의 맛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여느 마을과 비슷하게 우리 마을도 판잣집과 더불어 평평한 슬래브의 시멘트 집, 변형된 형식의 한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대부분은 가난했고,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는 오전반과 오후반이 별도로 운영될 정도로 많은 학생이 다니고 있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에 들었던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인지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살아왔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가난했던 그 시절에도 동네에는 ‘부잣집 아들’이 있었다. 지금 우리의 경제 수준과 비교하면 부자라고 말하기도 민망하겠으나 그때는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큼 여유 있는 가정환경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 시절 그 친구가 지금도 잘살고 있는지 가끔은 궁금하다.

좋은 여건으로 남보다 빨리 출발한 사람이 결승선에 먼저 도착하지만은 않는다는 세상의 이치가 신비로울 때도 있다. 하긴 국가 차원에서 봐도 그 시절 필리핀은 ‘부잣집 아들’과 같은 국가였다고 할 수 있으니 개인이나 국가나 세상의 이치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는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마라톤과 같다. 세계화가 성숙하여 하나의 지구촌이 된 지금의 세계 경제는 모두가 서로서로 경쟁의 대상이 된 서바이벌 게임이 되었다. 조금 앞서간다 해서, 힘들고 피곤하다 해서, 심지어는 코로나19와 같은 불가항력적 외부 요인이 있다 해서 잠시라도 멈추게 되면 자신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할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뒤로 물러나야만 한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누구나 멈추지 않고 달려야만 현재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특히,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 기업은 더욱 그러하다.

과거의 명성이나 막연한 기대만으로 성공한 기업이 되기 어렵다. 시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 낮은 원가와 높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생산성, 그리고 뭔가를 이루어 내겠다는 치열한 노력과 자기 헌신이 계속되어야 한다. 국내 소비자들이니까 국산 제품을 사 주겠지, 어려운 상황이 발생해도 누군가가 돕겠지 하는 생각으로는 살아남기가 어려운 것이 시장의 원칙이다. ‘가난’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게으름’과 ‘낭비’는 피해야 할 부끄러움이다.

경제적 성과를 위해서 사람다운 삶을 소홀히 하면 안 되지만, 경제 성장이 없이는 사람다운 삶을 유지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성장을 앞세우는 경제가 인간을 경시하는 느낌이 들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70억 명이 넘는 인류가 하나의 지구촌에서 모여 사는 현실을 차갑게 받아들여야 한다. 계속해서 뛰지 않으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뒤처지게 된다.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만 새로운 부가가치도 새로운 나눔도 만들 수 있다.

‘부잣집 아들’이 자기가 가진 것 모두를 나누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드는 일은 완전히 다른 문제일 뿐 아니라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주위에 인색한 ‘부잣집 아들’이 싫다고 해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가난하게 되어 버릴 수는 없다. 오늘날 내가 살던 ‘물앙말’은 현대식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가끔은 몸과 몸을 부닥치며 어울려 지냈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혼자 있을 때면 과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그 가난했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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