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관방장관은 이날 출마 소감으로 “아베 정권을 확실히 계승하겠다”고 밝혀 앞으로도 냉랭한 한일관계를 이어갈 우려를 낳았다. 스가 장관은 아베 정권의 대변인을 역임하며 몇 차례 한국에 강경 발언을 내놓았다. 지난달 1일에는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문제를 다룬 한국의 사법 절차를 두고 “국제법 위반”이라며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이 강제 매각될 경우 일본의 방향성은 확실하다”며 보복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한일 관계를 악화일로에 치닫게 했던 핵심이자 현재진행형인 갈등이다. 아베 정권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한국 대법원이 원고 승소 확정판결을 내리자 지난해 반도체 소재·부품의 한국 수출에 규제를 가했다. 이어 한국 법원이 일본제철의 자산 압류를 결정하자 이 같은 강경 발언이 나온 것이다.
스가 장관은 출마 기자회견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추진했던 평화헌법 개정과 납북 일본인 문제 등을 언급하며 “산적한 과제에 도전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평화헌법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명시한 헌법이다. 개헌은 아베 총리의 숙원사업으로, 2015년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규정한 안보법제를 도입하며 사실상 평화헌법을 무력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국의 반발과 국민 여론에 부딪혀 헌법 개정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지난해 산케이신문의 여론조사 결과 일본 국민의 64%는 평화헌법의 핵심인 헌법 9조를 바꾸지 않아야 한다고 답했다. 만약 스가 장관이 아베 총리의 뜻을 이어 헌법 개정을 밀고 나간다면 갈등에 기름을 붓게 된다. 개헌을 통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 선언은 한반도 개입 여지가 있어 추가적인 한일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아베 총리 집권 시기 한일 갈등의 원인이 된 또 다른 요인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의 위패가 보관돼있어 참배 행위 자체가 군국주의를 조장한다는 논란이 있다. 아베 총리는 2013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한국과 중국은 물론 미국에까지 실망스럽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 후로는 총리가 직접 참배하진 않았지만 매년 ‘종전의 날(8.15)’이면 꼬박꼬박 신사에 공물을 보냈다.
다만 스가 관방장관은 2013년 아베 총리의 신사 참배를 만류하는 등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자제해와서 차기 총리 자리에 오르면 아베 총리와는 다른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 그는 2012년 12월 관방장관이 된 후로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장관직에 오르기 전 개인적으로 간 적은 있지만, 외교적 마찰 우려로 자제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아베 총리는 한국에 사임 인사를 전하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냉랭한 태도를 보였다. 아베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로 인사를 건네며 납북 일본인 문제와 코로나19 대응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화 통화 후 자신의 트위터에 “내 친구 아베 총리와 멋진 대화를 나눴다”며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총리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돈독한 관계를 과시했다.
아베 총리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 차이잉원 대만 총통,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무함마드 빈 자예드 알나흐얀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왕세제,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등 15개국 정상과 트위터상으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빼놓으며 불편한 관계를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