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위의 땅 안반데기 정상에 있는 멍에 전망대에 몇 번 올라가 본 적이 있다. 산자락을 가득 메운 배추들과 수십 기의 풍력발전이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안반데기는 험한 산자락으로 화전민이 살던 지역이었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황폐한 땅으로 전락했다.
정부는 1965년 국유지 개간을 허가해 떠났던 화전민이 다시 모여 돌투성이 땅을 개간해 옥수수나 구황작물을 심었지만 척박한 땅인 데다 겨울이면 영하 30도로 내려가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주민들은 근근이 미국의 원조 양곡으로 버티며 지금의 대표 고랭지 배추 생산단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용수 부족으로 마을 밑에서 물을 끌어다 썼던 탓에 가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안반데기 주민들의 가장 큰 염원은 용수 부족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임시방편 급수차를 보내는 것 이외에는 마땅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 50여 년의 숙원이 풀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농림축산식품부 내 부서 간의 협업을 통한 창의적 발상이었다.
안반데기 숙원을 풀 수 있었던 것은 2016년 당시 안반데기 가뭄 현장을 돌아보던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의문에서 시작됐다. 산 중턱에 작은 저수지(취수보)를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가지고 김 장관은 채소과, 농업기반과 담당자를 불러 취수보 설치에 대한 논의를 했다. 농업기반과의 토목 담당자는 가능하다고 했다. 김 장관은 바로 강릉시와 협의해 국비 50억 원과 지방비 12억5000만 원을 만들어 농업용수개발사업을 진행해 안반데기 물 부족난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처럼 부서 간 협업이 없었다면 채소과 담당자는 산 중턱에 취수보를 설치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널리 쓰고 있는 드론 형태는 항공전문가가 만든 것이 아니라 전자공학을 전공한 스타트업에서 만든 것이다. 초기 드론 개발은 군사용으로 항공전문가가 만들었지만, 실제 민간 영역 상품화에는 한계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를 전자공학 전문가들이 단순히 날 수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 현재의 형태라고 한다.
애니메이션 회사인 픽사도 브레인트러스트 회의에서 구성원 간 집단 창의와 협업을 통해 창의적 성과를 창출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픽사의 브레인트러스트는 단순히 보고 중심의 회의가 아닌 이슈 해결 중심의 회의로 다른 분야 동료들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적극 개진할 수 있도록 했다. 상급자는 단순히 조언만 해줄 뿐 합리적 결론을 내는 회의로 진행하지 않았다. 최종 결정권은 실무자에게 주고 다른 직원들은 솔직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회의문화를 만들었다.
이런 협업 과정을 거치면서도 책임은 실무자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으며 실패 시 특정인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모두의 문제라는 문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같은 회의 문화로 픽사는 2006년 디즈니에 인수됐지만, 오히려 기업문화는 픽사가 디즈니를 인수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현재 문재인 정부의 대표 실패 정책으로 꼽히는 소득주도성장정책과 부동산 정책은 큰 줄기로 봤을 때는 분명 훌륭한 정책이다. 하지만 청와대가 담당 부처나 타 부처와 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 관계자나 전문가들의 얘기다.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현실에 맞게 조정만 했다면, 부동산 공급 병행과 종합부동산세·양도세·대출규제 정책을 타 부처나 현장 전문가들의 얘기를 조금만이라도 반영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차기 정부도 분명 청와대에 그 분야 최고 전문가가 배치될 것이다. 하지만 이 전문가가 본인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창의는 없어진다. 우리나라를 창조 국가로 만들어 세계와 경쟁하게 하려면 차기 대통령은 담당 부처뿐만 아니라 타 부처와의 협업을 이끌 수 있는 전문가를 배치할 수 있는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