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크래커] '신의 한 수'된 러시아의 흑해 장악

입력 2022-05-20 16:34 수정 2022-05-21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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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오데사 흑해 항구에 화물선이 정박돼 있다. 오데사/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오데사 흑해 항구에 화물선이 정박돼 있다. 오데사/로이터연합뉴스

곡물 썩기 일보 직전

세계 식량 물가가 치솟고 있다. 코로나와 전쟁 ‘겹악재’로 공급이 타격을 입으면서다.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통로인 오데사 항구를 봉쇄하면서 상황이 악화했다. 국제사회가 우크라이나 곡물을 ‘빼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묘수를 찾기 힘든 실정이다.

러시아는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흑해와 아조프해를 봉쇄했다. 러시아의 해상 봉쇄로 흑해 인근 오데사 항구에 발이 묶인 선박만 수백 척에 달한다.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곡물을 해외로 수출하는 선박이다. UN식량기구에 따르면 6일 기준 2500만 톤의 곡물이 쌓여 있다.

우크라이나의 최대 항구 운영 사업체 대표인 안드레이 스타브니처는“창고에 곡물이 꽉 차 있고 올해 생산량을 보관할 장소가 더 이상 없다”며 “곡물들이 썩기 일보 직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데사 봉쇄 해제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러시아의 오데사 항구 봉쇄는 우크라이나 주요 산업인 농업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의 90%가 흑해를 통한다.

세계 최대 곡물 수출국인 우크라이나 항구 봉쇄로 글로벌 식량 위기도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데이비드 비슬리 유엔 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은 “우크라이나 항구 봉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몇 달 내 세계에 기근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러시아가 지상전에서 고전하고 있지만 해상만큼은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러시아도 해상 장악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침공 첫 날, 흑해 북서쪽에 위치한 스네이크 아일랜드(즈미이니 섬)를 점령해 흑해 전체 장악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막사르 테크놀로지가 제공한 위성 사진에 1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흑해 즈미니섬(스네이크 아일랜드·뱀섬) 인근에 러시아의 세르나급 상륙정, 바지선 등이 침몰한 모습이 보인다.즈미니섬/AP뉴시스
▲막사르 테크놀로지가 제공한 위성 사진에 1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흑해 즈미니섬(스네이크 아일랜드·뱀섬) 인근에 러시아의 세르나급 상륙정, 바지선 등이 침몰한 모습이 보인다.즈미니섬/AP뉴시스

러시아 '아량'에 달린 식탁

1세기 전, 러시아는 항구 봉쇄의 충격을 경험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항구를 공격, 곡물 수출을 막아버렸다. 글로벌 식량 위기가 초래됐고 영국 주도 연합군이 흑해와 지중해 사이 통로를 개방하도록 압박하면서 러시아 무역이 재개됐다. 치솟던 식량 가격이 내렸고 러시아 경제도 살아났다. 그러나 효과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연합군은 다르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 상륙 작전에 실패했고 1년 후 철수했다.

100년 만에 공수가 뒤바껴 유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해상을 봉쇄한 채 식량을 무기로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어서다. 국제사회 역시 러시아 봉쇄로부터 우크라이나 곡물을 구해 글로벌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나섰다.

유럽은 육로를 통한 우회로를 찾고 있지만 수출 물량을 모두 소화하기엔 역부족이다. 결국 바다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해군 수송대가 곡물 선박을 호위하며 오데사 인근 항구로 옮기는 방안을 제안했다. 과거 1980년대 이란과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과 동맹국들이 유조선을 보호하던 작전을 재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전 나토 사령관인 제임스 포고는 “이란은 핵보유국이 아니었다는 점이 지금과 다르다”며 “핵보유국인 러시아와 갈등이 고조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당시 유조선 호위는 위험천만했다. 미국 군함이 이란과 이라크의 공격을 받았고 이란 여객기가 실수로 격추되기도 했다.

서방 국가들이 이끄는 수송대가 우크라이나 곡물 선박을 호위하다가 러시아와 일촉즉발의 상황에 내몰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군사·법·정치적 제약도 존재한다. 러시아는 2014년 병합한 크림반도에 설치한 대공·대해상 시스템을 통해 흑해를 손바닥에 올려놨다.

미국 해군전쟁 대학의 마이클 피터슨은 “러시아가 수송대 공격을 꺼리더라도 항구에 정박된 배조차 공격에 취약하다”며 “오데사는 크림반도에 위치한 러시아의 대함 크루즈미사일 사정권에 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호송대를 보호하려면 나토 해군의 주둔이 필요한데, 이 또한 법적 문제를 야기한다. 1936년 체결된 몽트뢰 조약에 위반될 수 있어서다. 몽트뢰 협약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 통제권을 터키에 부여하고 해군 전함의 통과를 규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터키는 교전국 해군의 통과를 사실상 금지하는 19조를 발동했다.

서구 사회가 러시아와 직접 부딪히는 상황에 선뜻 나설지도 의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3차 세계대전 발생을 우려해 우크라이나에 비행금지 구역 설정을 거부했다. 미국의 지원 없이 다른 국가들이 러시아와 직접 맞선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렵다.

이도저도 어려운 상황에서 비서구권 국가들이 국제적 압박을 통해 러시아 설득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비료 수출 제재를 완화하는 대신 오데사 곡물 수출을 일부 허용하자고 러시아에 제안했다. 전 세계 식량 안보가 러시아의 ‘아량’에 달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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