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금 가격이 잇따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배경에 각국 중앙은행의 무차별 매입도 한 몫 한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의 금 값 급등은 헤지펀드를 비롯한 투기세력과 안전자산 선호심리를 강화하고 있는 투자자들의 영향력이 컸다는 분석이 대세였다.
그러나 사실은 각국 중앙은행들이 22년만에 최대 순매수를 기록할 정도로 적극적인 금 매입이 금값 급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10일 보도했다.
영국 시장조사업체인 골드 필즈 미네랄 서비시스(GFMS)에 따르면 올 상반기 중앙은행들은 86t의 금을 순매수했고, 올해 전체는 지난 1988년의 242t 이래 22년만에 최대 순매수를 기록할 전망이다.
금 시장에서 중앙은행의 금 매입이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중국이 계기가 됐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지난해 금 보유량을 1054t으로 단숨에 80% 가까이 늘리면서 시장의 주목을 끌었다.
중국의 지난 6월말 현재 외환보유고는 2조4540억달러(약 2757조원)로 세계에서 가장 많았고, 외환보유고 가운데 미 국채 보유액도 최대였다.
자산 다각화 차원에서 유로와 금 보유를 늘린 것이 외환보유고 급증의 이유 중 하나로 분석되고 있다.
미 국채에 치우친 외환보유고를 분산시키기 위해 국제 시장에서 금을 사들일 경우 시장은 미 국채 매각을 배경으로 미 국채 가격 하락을 초래해 큰 손실을 입을 위험이 높다.
이 때문에 중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웃도는 세계 최대 금 산출국이라는 강점을 활용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인민은행이 자국에서 생산되는 금을 빼돌리면 공급 부족 분은 수입을 늘려 보충할 수 있기 때문에 금 수요를 계속 늘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중국과 같은 방식으로 금 보유량을 늘려왔다. 지난 6월말 현재 사우디의 금 보유량은 322.9t으로 보고됐지만 실제 금 보유량은 1000t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러시아는 외환보유고를 10%까지 늘리기로 공언, 금 보유량을 꾸준히 늘려 6월말 현재는 668.6t으로 전년 동기보다 60.9t이 증가했다.
중앙은행들은 특히 국제통화기금(IMF)이 작년 가을부터 매각해오고 있는 403t의 금에도 몰려든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해 인도(200t) 스리랑카(10t), 모리셔스(2t)에 이어 올 9월에는 방글라데시(10t)도 IMF에서 금을 사들였다고 발표했다. IMF에서 금을 매입한 국가는 대부분이 신흥국.
이들 신흥국은 급성장에 따른 자금 유입으로 자국 통화가치가 급등하자 달러 매입ㆍ자국 통화 매도를 통해 환율 개입에 나서고 있다. 이 영향으로 외환보유고에는 달러 기준 자산만 늘어 금 매입을 통해 자산의 다각화를 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편 유럽 중앙은행들은 신흥국들과 다른 이유에서 금에 집착하고 있다.
1990년대만해도 유럽 국가들은 보유하고 있는 금을 매각하는 데 열을 올렸다. 당시 미국의 강달러 정책에 힘입어 기축 통화인 달러에 대한 신용력은 절대적이었다.
이 때문에 유럽 중앙은행들 사이에서는 안전자산의 대명사인 금 조차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 장기적 안정세에 접어들고 이자를 취할 수 있는 국채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금 매각에 열을 올렸다.
급기야 1999년 9월 워싱턴서 열린 IMF 총회에서는 유럽중앙은행(ECB)을 포함한 유럽 15개 중앙은행은 과도한 금 매각을 자제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이 때부터 중앙은행들은 금 매각 규모를 점차 줄이기 시작해 금 현물시장에서 한때 600t이 넘던 중앙은행의 매각량은 지난해 30t까지 축소됐다.
그러나 2008년 시작된 금융위기는 이런 국면을 환기시켰다. 부도나면 휴짓조각이 될 수밖에 없는 채권의 인기는 수그러들고 금이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시작한 것.
중앙은행들은 금도 다른 투자 상품처럼 가격변동 리스크는 있으나 채무불이행에 빠질 위험이 없는데다 금으로 직접 국제결제가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영향으로 1999년 워싱턴 협정 당시 온스당 250달러대까지 떨어졌던 금 가격은 현재 5배 이상 오른 상태. 지난 8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금 가격은 온스당 1345.30달러를 기록했다.
수출을 두 배로 늘려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달러 약세를 용인하고 있는 점도 금 값 급등에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ㆍ금융 위기 탈출을 우선시한 나머지 통화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의무인 중앙은행이 금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있는 점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발표한 9월 28일 현재 대규모 투기세력의 금 순매수는 10개월만에 800t을 넘었다.
지난 5일 일본은행이 4년만의 제로금리 부활과 리스크자산 매입 등의 금융완화책을 발표하자 금 가격은 단숨에 30달러나 뛰었다. 일본은행의 금융정책 결정에 국제 금 값이 반응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는 디플레 대응과 양적완화 경쟁에 팔을 걷어부친 선진국 중앙은행에 금 가격이 새로운 '불안지수'로 떠오르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