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우 신한금융그룹 회장은 23일 중구 신한은행 본점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이 명예회장님이 지난 2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며 “회장님의 유지를 받들어 가족들만 참석한 채 영결식을 마쳤다”고 밝혔다.
조용한 영결식과 달리 그는 민족금융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부단한 삶을 보냈다.
이 명예회장은 1917년 경상북도 경산군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보다 큰 일을 하기 위해 1932년 열다섯 살의 나이로 현해탄을 건넜다. 1945년 광복 이후 오사카 동남쪽에 있는 쯔루하시역에서 무허가 자전거 타이어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쯔루하시 시장에는 귀국하지 못한 재일 한국인들이 절반을 차지했다.
이 곳에서의 시절은 그에게 민족금융기관을 설립하게된 계기가 됐다. 당시 재일 한국인들은 일본 경찰이 상점을 폐쇄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재일 상공인들이 금융 부분에서 겪는 불편함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 명예회장은 1947년 한국인들로 구성된 상점가동맹을 결성했다. 초대회장도 역임하며 재일동포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이 회장의 첫 번째 금융산업은 1955년 만든 신용조합인 대판흥은이다. 재일 상공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했다. 자금조달 창고 역할을 했다. 대판흥은은 오사카 지역 내 우량 신용조합으로 발전하며 10여년만에 총 예금고 100억을 달성하는 성장을 이뤄냈다.
1982년 7월 신한은행이 탄생하게 된 것은 그의 민족금융자본에 대한 열망의 연장선상이다.
이날 주주총회장에서 만난 머리가 희끗한 재일교포 주주는 “재일투자금융 등을 설립하며 이 명예회장이 한국 금융산업에 진출하려 했던 것은 산업의 발전보다는 민족적인 열망이 더 컸다”고 평가했다. 이 주주는 한 회장이 이 명예회장의 별세 소식을 전하자 한참동안이나 탄식을 내쉬었다.
재일투자금융은 재일동포들의 본국 금융시장 진출을 위해 1977년 만들어졌다. 한국에 진출하기 위한 상공인을 돕는 본국투자협회와 이 명예회장이 주축이 됐다.
신한은행 1982년 7월 설립됐다. 340여명의 재일동포들의 출자금을 모집한 순수 민간자본이었다. 류시열 전 신한금융 회장도 “순수 민간 자본으로 이뤄진 유일한 금융회사”라고 말했다.
이 명예회장은 1982년부터 2001년 2월까지 신한은행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1990년 3월에는 신한생명보험, 1991년에는 신한리스 설립을 주도했다. 1985년 6월에는 이미 증권업에 진출한 신한증권과 함께 신한금융그룹이 은행, 단자, 증권, 보험, 리스 등 금융의 각 분야에 참여토록 했다. 금융지주회사의 초석을 다진 셈이다.
“재물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신용을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
이 명예회장이 평소 신한은행 임직원에게 강조한 글귀다. 현재 신한금융그룹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