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쯤 컴퓨터 모니터에 ‘땡’ 소리와 함께 빨간불이 들어왔다. 대출이 승인 나지 않았다는 신호다. 김 대리는 허탈했다.
“주택담보대출은 심사 모형이 기업 여신에 비해 비교적 간단하다. 심사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고객은 신용도가 아주 낮은 편이 아니라 평소 같으면 바로 승인이 났을 텐데 결정도 늦어지고 결국 부결돼 어떻게 전해야할지 난감했다.”
은행의 여신 업무는 가장 퇴근이 늦은 부서로 꼽힌다. 오후 9시에 퇴근하면 정상적인 퇴근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이 때문에 은행원들은 수신업무보다 상대적으로 기피한다.
대부분의 업무가 전산화됐다고 해도 여전히 산더미같은 서류에 파묻히는 것도 곤혹이다. 기업 여신의 경우 재무제표, 등기관련 서류, 기업 분석 자료 등 필요한 서류가 법전 두께만하다.
최근에는 정부가 가계대출 증가 억제를 정책 목표로 삼으면서 가계 여신 업무가 더 곤혹스럽다. 안 해주면 그만이니 일거리가 줄 것이란 김 대리의 예상은 빗나갔다. 실수요를 찾으려니 심사가 더 까다로워졌다. 고객과 금융당국의 양쪽 성화에 짓눌려 스트레스도 커졌다.
신경이 곤두서는 건 고객을 대면하는 창구 직원뿐이 아니다. A은행의 여신담당 고위직도 가계대출 수위를 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 상무는 서둘러 대출 금리를 상향조정했다. 심사를 강화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이러자 이번에는 언론에서 “비올 때 우산을 뺐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실수요자들을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에 내몬다는 화살도 날라왔다.
그는 “최근에는 대출 업무가 리스크가 있어도 성과를 높일 수 있는 양날의 칼이라기 보다는 은행쪽에만 날이 서있는 칼이다. 여신을 늘리기는 힘든데 은행 측에서는 또 영업실적을 바란다. 이 때문에 대출보다는 펀드나 방카슈랑스 등 수수료 이익이 더 많이 나는 곳에 눈길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고 토로했다.
은행들 간에 정해진 파이를 두고 경쟁을 벌이는 것도 여신 업무가 달갑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B은행 기업여신부에서 근무하는 최아무개 부장은 “예전에는 기업에 돈을 대주는 입장인 만큼 어깨를 펴던 시절도 있었다”면서 “최근에는 바쁜 업무 와중에도 고개를 숙이고 새로운 고객 섭외 경쟁을 해야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