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풀지 못한 이념적인 한계와 권력 앞에서 명랑했던 한 여인이 무참히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그린 뮤지컬 대작 ‘엘리자벳’. 옥주현과 김선영이 분한 ‘엘리자벳’은 화려한 가창실력과 아름다운 자태까지 더해 19세기 엘리자벳을 현대에 재탄생시켰다.
자유분방한 소녀 엘리자벳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후가 되고 시어머니의 올가미같은 간섭에 점점 미쳐가는 장면은 흡사 영화 ‘올가미’를 떠올리게 한다.
정치적 권력, 아들을 쥐락펴락 하는 어머니의 그림자에서 자유를 꿈꾸는 엘리자벳의 모습은 늘 부족하고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제국주의에 반기를 들고 자유주의를 갈망하는 엘리자벳의 정치적 행보도 이와 마찬가지다.
‘죽음’은 의인화 돼 류정한,송창의, 김준수가 역할을 소화한다. ‘죽음’은 엘리자벳 곁에 늘 나타나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며 유혹한다. 엘리자벳이 프란츠 요제프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영원을 약속 할때도 ‘죽음’은 늘 그녀의 곁에 나타나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가 ‘죽음’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순간 엘리자벳은 주검으로 변한다.
‘죽음’과 함께 군무를 펼쳐내는 ‘죽음의 사자’, 날개가 찢겨져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상징하듯 한쪽밖에 남겨지지 않은 날개쭉지를 단 6명의 ‘죽음의 사자’들은 무대의 스산함을 더했다.
엘리자벳이 많은 인물 등장과 복잡한 플롯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 쉬운 역사적 이해와 상황을 납득시킬 수 있었던 데는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바라보는 루케니의 내레이션 덕분이다. 김수용, 최민철, 박은태가 분한 루케니는 관객과 소통하려는 시도를 하며 극의 정서적 공감을 끌어내는가 하면 위트있는 발언으로 관객을 웃게 한다.
이런 나레이터를 넘어 극 중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루케니를 바라보는 해석은 다양하다. 실제 역사속에서 엘리자벳을 암살한 인물인 루케니는 이념적 인물이다.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며 권력지배집단을 없애면 유토피아적 삶이 온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바닥 찬 감옥, 그리고 사형집행의 목줄이었다. 즉 극은 루케니의 손에 죽음을 맞는 엘리자벳을 그려내며 시대적 이념적 대립이 낳은 희생과 상처를 보여준다. 동시에 루케니가 사형의 선고장 목줄 앞에 선 장면은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의 비극적 끝을 의미한다.
혹자는 루케니를 ‘광기’를 추상화한 캐릭터로 해석하기도 한다. 루케니를 극 중 ‘죽음’캐릭터처럼 의인화 해 해석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19세기 이후 100여 년이 넘는 시간동안 비극의 역사가 휘몰아친 가운데는 광기가 있었다. 광기, 루케니가 엘리자벳의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단지 ~ 하고자 원했던. 갖고자, 이루고자” 했던 인간들의 모든 욕망, 그리고 그것에 대한 넘치는 욕망이 빚어내는 건 결국 비극의 역사였다. 광기와 죽음 사이에서 아슬하게 곡예를 부린 한 여인의 삶은 보는 이들을 숨죽이게 했다.
이것은 루케니 역시 마찬가지다. 제국주의 시대를 상징하는 제복이 아닌 후줄근한 면바지와 티셔츠인 현대복이다. 극에서 얼마든지 빠져나와 설명해가는 내레이터로서의 역할을 표현한 것이다. 또 상황과 시대를 표현해내는 것은 복장 뿐 아니다. 이 극의 가장 큰 묘미는 음악장르로 시대와 상황을 구분짓는다는 데 있다.
황궁생활 속 요제프와 엘리자벳 등이 나오는 장면은 클래식 음악으로 분위기를 잡았다. 또 죽음과 루케니가 나올 때면 록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현대적 표현을 줬다. 화려한 볼거리와 음악적 섬세함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복잡한 플롯에도 불구, 시선은 엘리자벳과 시어머니와의 대립에 집중돼 그녀의 역사적 사명자로서의 고뇌의 흔적은 플롯 속에서 약해졌다. 자유를 갈망했던 엘리자벳과 그의 아들 루돌프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루고자 했던 사명감은 대작 엘리자벳이 주는 작품의 무게만큼 관객들에 와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