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치레도 없이 여름에서 바로 가을로 가는 느낌이다. 계절의 변화는 순식간이다. 자연은 이렇게 표변(豹變)한다.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어 산사(山寺)를 찾는다. 절집을 구경하다가 문득 뒤를 돌아 마당을 본다. 굽은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달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반쯤 열린 문으로 개울이 슬며시 들어와 물소리를 풀어놓는다. 멀리 산문과 풍경들이 휘익 달려든다. 눈길 가는 곳마다 풍경화가 그려진다. 차경(借景)이다.
절집이며 정자와 누각이 대표적인 차경용 건축이다. ‘차경’은 풍경을 빌려온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연을 축소해 집안에 들여놓는 것을 축경(縮景)이라 한다. 세상의 모든 정원은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영국의 픽처레스크(picturesque) 정원은 시골의 목가적 풍경을, 이슬람의 정원은 사막의 생명인 오아시스를 재현했다. 정원문화가 발달한 일본은 수미산을 축경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집주인만 즐기는 독점(獨占)이다. 반면, 우리 선조들은 독점하지 않았다. 공유(共有)했다고 할까. 자연을 집안에 들여와 혼자 즐기기보다는 자연의 한쪽에 깃들고 자연을 차용했다. 자연 자체가 정원이 되기 때문이다. 분수(噴水)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풍경은 눈으로 보는 것뿐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기도 하다. 소리도 빌려왔다. 차성(借聲)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자연의 경제적 요소인 토지, 토지는 중요한 생산요소이다. 중요한 만큼 문제 유발도 크다. 주택문제와 양극화 모두 토지에서 기인한다. 전세값이 폭등하고 있고 그나마 매물도 없단다. 누군가가 생산과는 전혀 관계없이 엄청난 불로소득을 올리고 있다. 경제가 발전해도 노동은 빈곤하다. 경제 발전의 대부분을 토지 소유자가 차지하기 때문이다. 토지의 효용은 소유보다 차용에 있다. 이용을 마치면 가치가 줄어들어야 하는데, 반대로 그 가치가 폭등하여 소유자는 엄청난 소득을 획득한다. 대표적인 불로소득이다. 그렇다고 토지 사유를 금지할 수 없다. 자연을 차경(借景)하여 공유하듯 토지를 공유할 수는 없을까. 토지의 국유를 확대하는 것은, 불로소득에 대한 조세를 늘리는 것은 어떨까. 결국, 자연은 자연의 것이지 인간의 것은 아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