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선 고객이 뽑은 번호표에는 대기 인수 970번이라고 적혀 있었다. 예상 대기 시간은 5시간 58분이다.
사상 최악의 정보 유출 사고는 정부의 재발방지 대책에 대한 신뢰도 떨어뜨렸다.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대란 사흘째인 22일. 이날 오후 정부의 대책이 발표됐지만 카드 탈회 및 해지 요청 건수가 300만건을 넘어서는 등 카드 회원의 이탈은 더욱 가속화됐다.
이날 영등포 롯데백화점 내 롯데카드센터에 설치된 전광판에선 정부의 재발방지 대책 브리핑이 생중계됐지만 화면에 눈을 돌리는 고객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지없이 민원처리를 촉구하는 고객과 이에 대응하는 직원들의 대화만 쉼 없이 오갔다.
신용카드 재발급과 해지 신청을 하려는 고객들이 영업 시작 전부터 줄을 서서 대기하는 진풍경은 이날도 연출됐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창구의 고객들은 더욱 많아졌고 대기자 행렬은 끝이 안보일 정도였다. 대기번호는 1000번대를 넘어섰다.
마음이 조급해진 일부 피해자는 카드사 직원에게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이 없어졌다. 매번 고객이 호구라는 소리만 나온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다급해진 직원들은 “기다리지 마시고 휴대전화번호를 남기시면 저희가 연락드리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날 직원들을 긴 대기시간으로 고객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대기시간 없이 해결 가능’이라는 유인물 배포와 함께 자택에서 민원 처리를 권유하며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러나 피해 고객들은 못 미더운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차례만을 기다리며 대기했다. 한 중년 여성은 “집에서 해도 된다지만 시간이 얼마 걸리든 여기서 처리하고 가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며 지친 표정을 보였다.
그나마 은행은 상황이 나았다. 영등포 국민은행 지점과 농협지점을 찾았을 땐 대기인원 40명 정도로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 은행을 찾았지만, 롯데카드에 비하면 한산한 편이었다. 은행 곳곳에는 ‘정보 유출에 대한 사과문’이 게재돼 있었고, 각종 경제지를 인용해 2차 피해가 없음을 강조했다. 또 은행업무 연장과 카드 재발급 비용을 면제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피해 고객의 한숨은 짙었다. 국민은행을 찾은 한 50대 피해자는 “믿고 내 정보를 제공했는데, 이젠 못 믿겠다”며 불만을 표했다. 직원이 나눠 준 안내문을 심각한 표정으로 읽으며 한숨을 내쉬는 고객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날 오후 6시 KB국민·농협·롯데카드 등 3개사에 접수된 카드 탈회 및 해지 건수가 133만1000건으로 집계됐다. 카드 재발급을 신청한 건수는 164만9000건이었다. 이에 카드 해지 및 재발급 신청건은 298만건으로 늘어나 이날 저녁 300만건을 돌파했다. 정부 대책 발표가 나오기 전인 이날 정오까지 230만건이었지만 대책 발표 후 70만건이나 급증한 것이다.
카드해지 신청은 농협카드가 58만9000건으로 가장 많았다. 국민카드 57만8300건, 롯데카드 16만3700건이 접수됐다. 카드 재발급 신청 건수 역시 농협카드가 84만건으로 가장 많았다. 국민카드 43만6800건, 롯데카드는 37만2200건으로 나타났다. 정보유출 조회건수는 970만6900건으로 집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