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직장인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복싱체육관이다.
“퍽! 퍽! 퍽! 툭! 툭!” 경쾌한 샌드백 타격 음이 짙어가는 도시의 밤에 활약을 불어넣는다. 체육관 유리벽 넘어 낯익은 얼굴의 중년 신사가 손수 복싱을 지도하고 있다. ‘4전5기 신화’ 홍수환(64)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조합이다. 한국사회 부의 상징인 서울 강남과 헝그리스포츠의 대명사 복싱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40년 세월 속에서 풍화된 한국 복싱의 양 면이 존재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1974년 7월), 홍수환은 지구 반대쪽 남아공 더반으로 건너가 사활을 건 한판 승부를 펼쳤다. 상대는 당시 남아공이 자랑하던 세계챔피언 아놀드 테일러였다. 도박사들은 7-3으로 아놀드 테일러의 승리를 점쳤다. 그러나 홍수환은 강했다.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펼치며 챔피언벨트(WBC 밴텀급)를 허리에 둘렀다.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이듬해인 1975년 미국 LA에서 가진 알폰소 자모라(멕시코)와의 1차 방어전에서 4라운드 KO패하며 챔피언벨트를 빼앗겼다. 사각의 링에서 내려온 홍수환은 링보다 더 무서운 현실과 마주했다. 처참한 패배 탓일까. 그 많던 후원자는 모두 모습을 감췄다. 패배를 몰랐던 홍수환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이었다.
홍수환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랬다. 후원자는 없었지만 자비를 털어 알폰소 자모라와의 리턴매치를 준비했다. 1976년 와신상담하며 준비한 리턴매치가 인천 선인체육관에서 성사됐다.
그러나 홍수환은 끝내 알폰소 자모라를 넘지 못했다. 두 번째 시련이었다. 이제 홍수환에겐 일어설 힘도, 믿고 따라줄 사람도 없었다. 홍수환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어가는 듯했다.
홍수환은 두 차례의 혹독한 시련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됐다. 그럴수록 헝그리정신은 활활 불타올랐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시련이었지만 혹독한 훈련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며 마지막이 될지 모를 기회를 엿봤다. 지성이면 감천이랬다. 버림받은 줄만 알았던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1977년 11월, 홍수환은 국제복싱기구(WBA) 주니어 페더급 타이틀매치 헥토르 카라스키야와의 경기를 위해 파나마로 건너갔다. 그러나 카라스키야는 11전 전승 11KO승이라는 무시무시한 전적을 자랑하는 강적이었다. 홍수환이 상대할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홍수환은 2라운드에 무려 4차례나 다운당하며 가까스로 2라운드를 버텨냈다. 더 이상의 기대는 어려워보였다. 그러나 3라운드에 기적이 일어났다. 홍수환은 장기인 왼손 스트레이트를 수차례 적중시키며 카라스키야를 구석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비틀거리던 카라스키야의 안면에 왼손 훅을 날려 바닥에 눕혔다. 카라스키야는 일어나지 못했다.
믿겨지지 않지만 홍수환의 승리였다. 한국 스포츠사에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이날 경기는 가난하던 시절 온 국민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지독한 헝그리정신이 만들어낸 거짓말 같은 실화다.
당시 복싱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생 역전을, 어린 아이들에겐 꿈과 희망을, 성인 남녀에게는 감동과 환희를 안겨준 국민스포츠였다. 빅 매치가 있는 날이면 TV 앞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열열이 응원하던 시절이 있었다. 복싱은 가난한 나라 한국의 한과 설움을 대변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의 복싱은 극도로 소외된 비인기 종목으로 전락했다. 세계챔피언이 된다 해도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방어전을 치를 수 없는 실정이다.
“퍽! 퍽! 퍽! 툭! 툭!”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홍수환스타복싱체육관의 밤은 여전히 활력이 넘친다. 하지만 이곳에선 더 이상 헝그리정신을 찾을 수 없다. 이곳에 모인 젊은이들은 배고픔도 인생역전도 꿈꾸지 않는다. 그들에게 복싱은 다이어트와 호신용일 뿐이다.
40년 전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이던 헝그리스포츠 복싱은 이제 ‘4전5기 신화’의 주인공 홍수환의 기억 속 산물이 돼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