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그런 의미에서 권위를 가져야 한다. 권위가 사회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은 이미 교황 방한을 통해 체험한 바 있다. 즉 우리가 교황에게 열광하고 교황이 있어 행복했던 이유는 힐링과 위안을 느낄 수 있어서였지만, 그 근본에는 바로 우리 사회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사회적 권위를 잠시나마 되찾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권위는 한 사회에서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런 권위는 민주화 과정에서 실종됐다. 민주화라는 중요한 결실을 얻는 과정에서 권위를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권위의 실종’이 반드시 민주화와 관련 있는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해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우리나라 국회가 그 사례다.
지금 국회는 거의 마비 상태다. 국회가 ‘전신마비’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여야가 국회라는 틀 속에서 합의한 세월호특별법이 두 번이나 협상을 다시 해야 할 위기에 처해졌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한 번 생각해 보자. 국회라는 대의민주주의의 전당에서 여야가 합의한 사안에 대해 정치권이 국회 밖의 다른 존재에게 ‘허락’을 받으려고 한다면, 국회는 더 이상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대의집단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세월호 유가족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아픔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하지만 유가족들의 주장에 공감을 표하는 것과 이들의 주장대로 법을 만들거나 아니면 제도를 초월하려 한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즉 유가족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들의 요구를 제도에 그대로 모두 투영하려 한다면 제도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귀가 길에 강도를 만나 부상을 당했는데 119가 늦게 도착해 목숨을 잃었다고 가정할 때, 이 학생의 부모 역시 자식을 잃은 슬픔과 함께 강도가 활보하도록 둔 정부의 치안 정책과 늦게 도착한 119에 대해 원망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학생의 부모가 고용한 검찰 출신 변호사에게 수사권을 준다면 경찰과 검찰은 존재 이유가 없어질 것이다. 결국 이 부모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 이들이 고용한 변호사에게 수사권을 주는 것은 제도를 부정하고 제도를 망가뜨리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 국회, 특히 야당의 행동을 보면 국회의 권위를 그 구성원 스스로가 망가뜨리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국회가 스스로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있는 모습은 ‘방탄국회’ 문제와 해당 국회의원들의 처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이번에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된 의원들의 처신을 보자. 지난 21일 검찰은 구인장을 갖고 국회를 찾아갔다. 22일부터는 지난 19일 밤 11시59분 공고가 난 ‘방탄국회’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냥 손 놓고 있다가는 이들 의원에 대한 공권력 집행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새정치민주연합 신학용 의원을 제외한 다른 의원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다. 심지어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차명 휴대전화를 갖고 잠적했다. 이들 의원은 어떻게든 21일 하루만 견디면 22일부터 임시국회가 시작되기 때문에 자신들을 건드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그래서 의원의 체면이고 뭐고 잠적하고 숨는 볼썽사나운 짓들을 한 것이다.
이런 의원들의 모습 속에서 의원들의 권위, 국회의 권위를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이런 의원들을 보호하겠다고 밤 11시59분 임시국회를 소집하는 야당이나, 이런 야당에 슬쩍 묻어 가려는 여당이 우리 국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국회의 권위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잃어버린 국회의 권위 복원은 우리 유권자 스스로가 해야 할 과제다. 스스로의 권위를 망친 국회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유권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