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한국 뮤지컬 시장을 상징하는 대표적 키워드는 급성장이었다. 영화와 음반산업이 성숙 단계를 넘어서 쇠퇴 단계라면 뮤지컬은 본격적인 산업화에 승승장구 성장하는 한국 문화산업의 대안으로 기대돼 왔다. 그런데 지금 뮤지컬산업의 키워드는 위기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조사 결과를 보면 올 상반기 공연예술 경기 체감지수는 56.31이다. 조사를 시작한 2009년 이래 최저치란다. 한국 뮤지컬 시장을 초창기부터 주도해 온 1세대 프로듀서인 설도윤 한국뮤지컬협회장은 IMF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고 한숨으로 증언한다. 맞다. 나 또한 1986년 연희단 거리패 창단 멤버로 연극을 시작해 끔찍하게 열악한 분야인 줄 알면서도 현장 예술의 매력에 빠져 공연 기획자로, 창작뮤지컬 프로듀서로, 뮤지컬 교육자로 30여 년간 개척과 도전으로 생고생해 왔지만 올려진 공연이 중단되고 제작사가 야반도주하듯 사라진 일은 처음 본다. 올 상반기 경기 체감 지수도 세월호 참사 여파로 단정 지으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할 수만은 없다. 하반기에 과거 흥행작들의 재공연으로 시장이 다소 활성화되는 듯 보이지만 임시방편이다. 그동안 급조된 제작 과열과 공급 과잉, 스타 마케팅 의존과 베팅으로 부풀려진 시장의 바람은 이미 빠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차라리 곪은 상처 터질 대로 터져 새 살 돋듯 투명하고 건강한 시장 생태계가 재편되기를 바라는 심정들이다. 그 과정에서 썩은 살 도려내는 진통도 클 것이다.
10년 전, 한국 영화 시장을 닮았다. 급성장과 함께 스타 개런티 상승이 제작비를 압박해 영화제작자협회가 한목소리를 냈고 언론도 들끓었다. 그때 영화계에서 존경받는다는 배우 안성기가 본인 개런티를 1억원으로 동결하고 가치 있는 저예산 영화에 노개런티로 출연하며 살신성인했고 후배 배우들이 줄줄이 동참해 영화 제작 규모에 맞는 개런티를 현실화하는 자정적인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 뮤지컬 시장이 그 위기에 놓였고 이 순간에도 뮤지컬 스타들의 회당 개런티는 치솟고 있다. 공연 제작 수 대비 인기 주연 남자배우의 수가 턱없이 불균형하고 잘나가는 배우는 몇 편의 뮤지컬에 동시에 출연하는 기현상도 풍토가 됐으니 개런티 상승 곡선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 영화 시장 규모는 1조5000억원이 넘고 한국 뮤지컬 시장 규모는 3000억원밖에 되지 않는다. 제작 규모와 개런티 규모의 함수 관계를 되짚어봐야 한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 살 수 있지 않을까? 안성기는 스스로를 마라톤 페이스 메이커라고 했다. 우리도 오래 살아남으려면 살아남을 시장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한국 뮤지컬 시장은 주연 스타와 다른 배우들과의 개런티 폭이 너무 큰 양극화 현상도 해결 과제다. 월급쟁이 학자인 나로서는 직접 나설 수도, 해법을 외칠 수도 없어 더 안타깝다.
그런데 얼마 전 그 해법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배우 안재욱이 지금 한국 뮤지컬 시장의 위기를 공감하고 제작사에 스스로의 개런티를 조절했다고 한다. 올해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의 딤프대학생뮤지컬페스티벌 연기상 수상 학생들을 위해 브로드웨이 연수 장학금으로 상금 500만원을 쾌척하며 뮤지컬 인재들이 뮤지컬 현장을 체험하는 일이 중요한 미래 가치임을 강조했던 안재욱의 성품과 가치관을 경험했기에 그 솔선수범의 진의가 충분히 읽혀진다. 그는 공생할 미래를 가꾸고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면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비전을 확신해야 한다. 그리고 그 확신을 스스로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 뮤지컬 시장에 미래가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