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후 2시, 서울 송파구 신천동에 위치한 잠실고등학교. 현대자동차의 채용 관문인 인적성검사(HMAT)를 마친 수백 명의 수험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교문을 빠져나오는 이들은 서로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시험문제를 되새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단연 화제는 역사문제. 정문 근처에서 수험생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어떻게 작성했냐?’고 서로 묻고 있었다.
수험생에 따르면 이번 현대차그룹 인적성검사 에세이 주제는 ‘로마와 몽골 제국의 성장과정과 이를 바탕으로 현대차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기술하라’와 ‘역사에서 저평가됐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위대한 인물과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 두 가지였다. 수험생은 두 문제 모두 700자 이내로 서술해야 했다.
김모(27)씨는 “역사 문제가 출제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국내사만 주로 들여다봤다”며 “세계사 부문이 나와 당황했다”고 털어놨다.
이모(26)씨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해 역사 부문은 취약하다. 고민만 하다가 제한 시간 40분이 다 흘러간 것 같다”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9일 실시된 현대차의 인적성검사는 이공계 지원생만을 대상으로 열렸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이공계 지원자들은 이날 서울, 부산, 광주, 전주 등 전국에서 동시에 시험을 치뤘다.
잠실 지역에서만 3개의 학교에서 수험생이 시험을 볼 정도로 ‘현대차 고시’를 보려는 지원자들은 많았다.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이날 응시생은 2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현대차는 올해부터 연구개발, 플랜트와 같은 이공계만 공개채용을 하고 있다. 인문계는 상시채용으로 전환했다. 공개채용이 이공계로 한정되다 보니 역사 에세이 문제에서 당혹감을 보인 수험생들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취업 재수생인 최진우(28)씨는 “전공 성적만 좋으면 취업이 쉽게 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취업이 늦어질 수록 공부해야 할 것이 더 많아지는 것이 가장 어려운 점”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현대차는 지난해부터 채용 과정에서 역사 문제를 출시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에는 ‘고려, 조선시대 인물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과 그의 업적을 설명하고 이유를 쓰시오’와 ‘세계의 역사적 사건 중 가장 아쉬웠던 결정과 자신이라면 어떻게 바꿀지 기술하라’ 중 하나를 택해 기술하도록 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세종대왕이 과거 시험에서 출제했던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구별법이라는 문제를 자신이 받는다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 유산 두 개를 골라 이유를 쓰시오’, ‘역사 속 발명품 중 공학도의 자질과 연관있는 발명품을 선택해 이유를 쓰시오’ 등 3가지 항목 중 2개를 고르도록 했다.
현대차 이외에도 국내 대기업들은 채용 과정에서 인문학 소양을 강조하는 추세다. 포스코는 한국사 자격증 소지자를 우대하고 있으면 삼성그룹도 직무적성평가(SSAT)에서 역사 비중을 높이고 있다.
바늘 구멍인 취업문을 통과하려는 최씨는 터벅터벅 걸으며 교문에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