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그룹, 기아자동차 등 굵직굵직한 기업들이 쓰러지고, 국내 최고의 증권사였던 고려증권과 동서증권이 파산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한다. 다시 석달 후. 국제적으로 이목을 끈 사건이 벌어진다.
1998년 2월 서울지방법원에 소장이 제출됐다.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는 SK증권. 상대는 JP모건이었다. SK증권은 금리 2%대의 엔화를 빌려 20%가 넘는 루피화와 바트화에 투자를 해서 국내 금리보다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JP모건의 파생상품에 가입했다가 투자금을 몽땅 날렸다. 투자액이 무려 5300만달러다. SK증권이 JP모건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바로 국내 증권사들이 투자자들로부터 소송을 당하는 이유다. 이른바 투자자 보호를 위한 설명의무다.
전문가들이 모였다는 증권사조차도 설명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소송을 내는 마당이었다. 그러니 투자자들이 증권사를 상대로 내는 소송은 어떠했을까? 개인투자자는 물론이고 법인 자금을 운용하던 증권사들도 소송에 몸살을 앓았다. 태국 바트화 폭락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한국으로 번져 주가는 그야말로 경악할 정도로 폭락했다. 그러니 그 뒷감당이 어떠했을까?
투자자 보호는 이제 지상과제처럼 되어버렸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벤처기업 육성정책으로 증시가 상승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썰물이 빠져나간 뒤 투자자들의 아우성이 빗발쳤다. 이 시기 이익치 전 현대증권 사장이 기치로 내건 ‘바이 코리아’로 펀드 시대가 열렸다. 돈다발을 싸들고 현대증권 지점에 고객들이 그야말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역시 후폭풍을 피할 수 없었다. ‘투자자 보호’는 또다시 여의도 증권가를 옥죄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글로벌 증시의 호황 속에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이 최초로 선보인 ‘적립식 펀드’는 우리나라 투자 문화를 한층 업그레이드시켰다. 이 열풍에 힘입어 미래에셋그룹은 2007년 말 ‘인사이트 펀드’를 내놓았다. 엄청난 자금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직격탄을 맞고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그래서일까? 요즘 대세라고 하는 주가연계증권(ELS)은 원금보장을 내세운다. ‘중위험 중수익’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묻고 싶다. 중위험은 위험하다는 것일까? 안전하다는 것일까? 고위험과 중위험은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원금보장이라는 게 투자시장의 본질에 맞는 것일까?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투자시장에서 원금을 보장해주는 것은 카지노에서 판돈을 잃은 사람에게 본전을 되돌려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카지노에서는 본전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해외 에너지자원 개발사업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했지만 원금을 보장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투자시장은 원금을 보장해주지 않는 시장이다. 중위험이라는 애매한 말이 통용되는 시장이 아니다. 투자시장은 본질적으로 ‘고위험(High Risk)·고수익(High Return)’ 시장이다. 고위험, 중위험, 저위험의 분류는 없다. 그냥 위험한 것이다.
원금보장을 받고 싶다면 은행이나 보험을 찾아가야지 투자시장에 기웃거리면 안된다.
그런데 시장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금융당국의 정책은 투자자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금만 손해가 나도 증권사 상대로 민원을 제기하는 투자자가 넘쳐난다. 증권사들은 악성 민원에도 움츠려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중위험·중수익이라는 상품을 내다판다. 투자자들은 그들대로 위험은 피하면서 은행보다 높은 수익을 올리려는 이상한 계산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런 시장이 선진 금융시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실력이 길러질 수 있을까? 시장의 본질적인 성격이 변질되고 있는 마당에 무슨 글로벌 투자시장을 논할 것인가?
금융당국의 정책 초점에 변화가 필요하다. 과도한 투자자 보호는 블랙컨슈머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투자시장의 본래 성격을 변질시킨다. 투자시장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IMF 구제금융 20년이 다 되도록 투자문화 하나 바꾸지 못하고 ‘투자자 보호’라는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면 그 시장은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금융정책당국, 투자업계, 투자시장 참여자 모두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