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청명, 오늘은 한식.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마찬가지라지만 이 무렵의 봄은 하루가 다르다.
중국 춘추시대의 공자(公子) 중이(重耳)가 굶주리며 유랑하던 시절 개자추(介子推)라는 신하가 허벅지살을 베어 바쳤다. 이런 할고봉군(割股奉君)의 충성에 힘입어 중이는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한 사람인 진문공(晉文公)이 됐다. 그러나 개자추는 공신 명단에 들지 못하자 산에 숨어버렸다. 문공이 잘못을 뉘우치고 찾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문공은 그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산에 불을 질렀다.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홀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숨졌다. 이때부터 개자추가 죽은 날 음식을 할 때 불을 쓰지 못하게 한 게 한식(寒食)의 유래다.
충성스럽고 올곧은 사람의 이야기 같은데, 장자는 도척(盜?)편에서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개자추, 여자를 기다리다가 물에 빠져 숨진 미생(尾生) 등을 비판했다. “명목에만 달라붙어 죽음을 가벼이 여기고, 본성으로 돌아가 수명을 보양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皆離名輕死 不念本養壽命者也]는 이유였다.
그러나 어쨌든 허벅지살을 베어 올리는 것은 지극한 충성이나 효성이다. 백범 김구 선생도 위독한 아버지를 위해 허벅지살을 베어냈으나 두 번째는 고통 때문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하고 ‘백범일지’에서 한탄했는데, 백범(白凡)은 호와 달리 역시 범인이 아니다.
연암 박지원은 아버지가 위독하자 왼손 중지를 그어 피를 약에 타 올렸다. 효행으로 유명한 진양 하씨 가문의 ‘가대인시탕시일기’(家大人侍湯時日記)를 비롯한 효자 이야기에는 이런 단지주혈(斷指注血)의 사례가 수없이 많다. 부모의 똥을 맛보아 탕약을 끓이고 그 탕약에 피를 섞는 식이다. 허벅지살을 베어내는 것만은 못하겠지만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